사실 어떠한 설명이 주어졌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아성은 거의 자동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함이다. 맞은편에 앉은 수사관은 협조적인 아성의 태도에 어느 정도 안심한 것 같았지만, 감시이자 관찰의 시선을 완전히 거둬들인 것은 아니었다.


활자가 빼곡히 들어찬 서류 낱장 위로 직사각형 필름지가 여러 장 겹쳐졌다. 사진이다. 검게 그을린 잔해, 화마의 흔적. 그리고 사지가 잘려나간 주검과 한 데 엉겨있는 신체의 일부분들…. 사진을 바라보던 눈두덩이 가늘게 떨렸다. 진갈빛 홍채가 동공을 확장시키더니, 속눈썹이 마지막 날갯짓처럼 파들렸다. 끔찍했다. 단지 사건 현장이어서가 아니다.




아성은 주로 알려지지 않은 임무에 투입되었고 수많은 지옥을 겪었다. 아직 한쪽 팔에 둘러진 삼각건을 풀지 않은 채, 얼굴에도 상흔을 잔뜩 달아놓은 행색이 아니던가. 문득 존재하지 못할 누군가에 대해 떠올렸다. 시작부터 이 세상에 그의 인생을 증명할 것은 없었고, 생을 마감한 후에도 영원히 유령처럼 부유해야 하는 존재이다. 벌써 두 달 전의 어느 날이지만, 아성은 똑똑히 기억했다. 하늘이 유난히 푸르렀으며, 두 사람은 오전 티타임을 즐기면서 당일 투입될 작전에 대해 농담을 주고받았었다.



"정명?"



나긋한 일침이다. 수사관에게 호명된 순간, 빠르게 눈을 깜빡거리며 질문을 재청했다. 아성은 현재 '정명鄭明'이란 위장된 신분에 숨어 있다.






"우리는 그 날 폭파 사건에 모종의 세력이 연관되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



"물론 그 엄청난 세력의 전말을 묻겠다거나 하는 건 아닙니다. 당신은 치안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관일 뿐이니까요."






사고 직후, 요원 두 명의 신병을 확보하지 못했던 본부에서는 발 빠르게 두 사람의 신원을 세탁했다. 은행 신고를 받고 순찰 겸 들렀던 경관 두 명의 이야기가 그러했다. 결과적으로 경관 한 명 사망,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중상으로 혼수상태에 빠져있다가 기적적으로 생을 되찾았다.





"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갑자기 굉음과 함께 폭발이 시작됐고…."



"수상한 자들은 없었나요? 손님이나 직원 외에,"



"딱히 수상했던 점은 모르겠습니다."



"이런 표식을 지닌 사람들은?"



"...없습니다."





수사관이 새로운 것을 내놓는다. 기하학적인 패턴이 복잡하게 얽힌 듯했으나, 결국 하나의 문양이다. 시체에서 촬영한 사진인지 털이 돋아난 종아리 밑부분에 새겨져 있다. 눈을 부릅뜨고 그것을 바라보던 아성은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죽은 놈이 말단이었으니, 이런 개죽음을 당해도 쉽게 신분이 노출되는 것이다.


지금 당장에라도 머리를 박박 밀어낸다면 파르라니 드러난 아성의 두피, 귀 뒷면에 손톱만 한 크기로 새겨져 있을 그 문양과 일치했다. 아성은 두통이 밀려온다는 식으로 미간을 구기고 관자놀이를 짚었다. 수사관이 초조해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심문실의 삭막한 전경을 무심히 바라보던 아성이 수사관의 어깨너머, 자신의 모습이 반사되는 커다란 유리창을 응시한다. 그의 시선은 초점이 없어 보였다.


저 유리 너머에서 여유로운 눈빛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을 사내를 짐작한다. 왕천풍은 수사당국의 간부로 오랜 시간 위장근무를 하고 있다. 바로 오늘과 같은 사태를 대비하기 위함이기도 했고, 주요 정보를 계속적으로 염탐하고 조작하기 위한 중책을 맡았다. 아마 이 자리에서 아성이 조직의 정체에 대해 조금의 정보라도 흘리게 된다면 그 자리에서 즉사할 수도 있었다. 신경독, 폭발. 그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합니다. 정말...아는 것이 없습니다."





수사관은 퍽 실망한 표정으로 한숨을 쉰다. 이제 30대 중반에 접어든 것 같은 수사관은 분명히 의욕적으로 이 사건에 뛰어들었을 거다. 아성은 갈빛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다른 누군가를 떠올렸고, 잠시 마음속에 일말의 동정 비슷한 것이 솟으려 했다. 이런 감정이 참으로 오랜만이다.


눈앞의 수사관은 며칠 내로 사고를 당해 순직처리 된다. 아성은 그의 미래를 불 보듯 뻔하게 예언하며 측은함을 잠시 느끼는 중이었다. 젊고 혈기 왕성한 수사관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며 조직의 안위를 위협하는 꼴을, 본부에서 두고 볼 리 없다. 아성 역시 그런 하찮은 목숨을 거두기 위해 위장 작전에 투입된 적도 적지 않았다.





"파트너의 일은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워낙 시체가 훼손되고, 다른 주검과 뒤엉킨 탓에 수습이 불가능하겠지만."



"……."



"어떤 사람이었죠? 련평鍊平말입니다."



"그는,"






얼마 만에 듣는 이름이란 말인가. 삼각건에 의지해 늘어져 있던 팔이, 성치 못한 근육들이 일순간 딱딱하게 굳는 착각이다. 목구멍에 거친 가시가 돋아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련평. 그 이름은 명루의 신분 위장용 가명이었다. 사고 직후 의식을 회복했을 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반 시체 상태의 아성은 간호사로 위장한 본부 요원의 오더를 받았다. 두 사람의 위장된 가명과 신분에 대한 설명, 수사관이 심문을 요청했을 때 증언해야 하는 대강의 내용이었다.



수사관은 어쩌면 폭발현장에서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었을, 제복만 남긴 채 산화된 련평이란 사내에 대해 단서를 찾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건 도리어 아성이 묻고 싶은 내용이다. 명루는 어떻게 된 걸까. 일말의 기대를 품고서 그의 기적적인 생존을 바랐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전달된 파일 속에서 사고 현장을 샅샅이 분석한 아성은 곧 기대를 지웠다. 그는 홀연히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명루. 명루 사형….




"좋은 분이었습니다. 사려 깊고."




유리창 너머 시린 눈빛이 느껴졌다. 왕천풍의 것이다. 먹이를 덮치기 전 독사의 눈과 혀를 하고, 아성을 좇고 있을 것이었다.




"...빈틈이 없었죠. 그 날도."




심문실의 녹화 테이프가 멈추었다.
















* * * 















건물 안인데도 복도를 거닐며 입김이 새어 나온다. 모스크바의 기후는 혹독했고, 적응하는데 긴 시간을 소비했다. 간단한 식량을 사 온 아성은 복도 가장 끝에 자리한 문 앞에서 열쇠를 찾았다. 이중으로 된 잠금장치를 해제하기 전, 문틈에 끼워두었던 샤프심을 먼저 제거했다. 


사고를 겪은 후 현장에 복귀하기까지 1년 반 정도의 시간이 소요됐다. 복귀 후 다시 3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아성은 본래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찾은 것 같다고 스스로를 위안하기에 이르렀다. 다음 주 러시아 방문이 예정된 유명 정치인의 납치 및 생포가 그에게 주어진 미션이다.


집 안에 들어와 가장 먼저 난방기기를 작동시킨다. 장갑을 벗고,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식탁에 올려놓았다. 목도리와 코트를 벗어내던 아성은 물끄러미 난로 옆에 걸린 사각의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은 등지고 있는 창가를 볼 수 있도록 각도가 계산되어 있다. 곧 벗은 코트도 목도리 위에 반으로 접어 걸쳐두나 싶던 그는 빠르게 코트 안 주머니에서 총을 꺼내 들었다.




"……."




가장 먼저 창가 옆 커튼을 살핀다. 창가에 미세한 틈이 열려 있는 것을 다시금 확인한다. 카펫이 깔린 바닥을 소리 없이 밟으며 주방 모퉁이를 돌던 중, 아성의 몸이 나가떨어졌다. 광대뼈를 정확히 팔꿈치로 가격당했지만 못 일어설 정도는 아니다. 저편으로 날아가 버린 총은 뒤로하고서 재빨리 몸을 일으켜 방어했다.


상대는 한 눈에 보기에도 아성보다 체격적인 우위에 있다. 숨 쉴 틈 없이 쏟아지는 공격에 당하지 않으려 바쁘던 그는, 단단하고 차가운 금속성의 물체가 여러 차례 제 머리를 가격하자 중심을 잃었다. 먼지 한 톨 찾아볼 수 없는 신사화, 기장과 피팅감이 알맞은 슈트팬츠가 눈에 들어왔다. 고꾸라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인 채로, 뒷덜미를 움켜쥔 채 억지로 상체를 끄집어 올리는 상대를 본능적으로 노려보았다. 이쪽 세계에서 얼굴을 봐버린 목격자를 살려두는 경우는 없다. 살기 위해선 상대를 죽이는 경우의 수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입에서 도는 비릿한 피 맛에 침을 뱉고, 눈길을 올렸을 때였다. 아성은 억센 손아귀로 볼을 움켜쥔 사내가 뜨거운 눈길로 저를 응시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연옥처럼 검게 타오르는 두 눈이었다. 숨이 멎을지도 몰랐다. 사내는 한쪽 눈이 사라진 듯했다.





"오랜만이구나. 아성."



"명,ㄹ...사형..."



"네 입에서 다시 그 이름을 들을 수 있다니. 아직은 살아갈 가치가 있는 세상이야."



"……."



"비록 세상이 지옥 자체일지라도 말이다."




낮게 덧붙인 명루는 피투성이가 된 이마에 가볍게 키스한다. 그리고 다시 구타가 시작됐다. 머리를 내리쳤던 촛대를 내던진 채, 정확히 급소를 노려 주먹질이 쏟아진다. 이를 악물고 새는 기합도 더러 섞였다. 그는 열과 성을 다해 아성을 망가트릴 심산인 것이다. 바닥에 내쳐지고, 다시 끌려 올라가 몸을 내놓던 아성은 비척비척 뒷걸음질을 치다가 마침내 거실 소파에 다다랐다. 아직 익숙한 제 내음을 물들이지도 못한, 집 안의 진청색 소파에 몸이 쓰려졌다. 피가 물들어 검푸른 색감이 소파에 번졌다.


이전보다 마른 얼굴선이었지만, 여전했다. 인상적인 눈썹 뼈와 우뚝한 콧날. 모든 것이 5년여 전 명루를 떠올리게 했다. 단지 그는 오른쪽 눈에 검은색 안대를 착용한 채, 알듯 말듯 미소를 짓고 있다. 충분히 차갑고 시린 모습이다.






"모스크바 여행은 어떤가. 기억에 남을 만한가? 금방 돌아가야 하는 건 안타깝지만."






토혈하는 걸 무심히 내려다보며, 명루는 장갑을 꼈다. 아성을 완벽히 무력화시켜놓고 나서야 그는 유유히 걸어가 현관문을 열어준다. 언제부터 대기하고 있었는지 복면에 점퍼 차림인 건장한 사내 여럿이 들어섰다. 군화와 복색을 볼진대 중동 계열의 용병들 같다. 그들에게 손짓으로 현관과 주방 쪽을 가리켜 배치하더니, 방금 사 들고 왔던 식탁 위의 뭉치들을 살핀다. 간소한 식량들이 차례차례 바닥에 구르고, 마지막 남은 통조림 캔 두어 개를 집어 든 명루가 만면에 미소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는 부엌간에 놓인 자루에 담긴 걸 모두 쏟아내고, 자루 안에 묵직한 통조림 캔을 던져 넣는다. 명루가 거실로 다가오고 있다.


자꾸만 피가 쏟아져서 눈을 뜨기 힘들다. 그래도 아성은 연신 피를 닦았다. 눈앞의 명루가 어떤 짓을 벌이고, 또 앞으로 무슨 일을 벌일지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심한 중이다. 단지 명루의 생존에 대해 크나큰 충격에 빠진 중이었다. 분명 본부에서는 그의 사망을 확인해주지 않았던가? 왕천풍에게 추후 받았던 기밀 파일과 명루의 치아 정보가 매치된 신원 미상의 사체…….




"아성."




머리채가 잡혔다. 짧고 단정하게 자른 머리칼을 비명이 터질 정도로 억세게 쥐어잡은 거다. 명루는 나머지 한손에 들린 자루의 끝부분을 손잡이처럼 바짝 당기고 빙빙 돌렸다. 마치 조금이라도 더 단단하게 고정하는 것처럼.


멍하니 그 광경을 올려보던 아성이 막 입을 열려는가 싶을 때, 마침내 그게 날아들었다. 묵직하고 단단한 캔이 원심력을 받아 무자비하게 두들겼다. 머리채를 잡힌 채 도망갈 수 없는 얼굴은 물론, 아성의 몸 이곳저곳을 내리친다. 애써 눌러 삼킨 비명들이 꾸역꾸역 바닥을 기었고, 사내들은 미동도 없이 자신이 배치받은 구역에서 자리를 지켰을 뿐이다.






"폭발 직후, 네가 사라졌을 때 미쳐버리는 것만 같았다. 눈앞에서 너를 잃다니..말이 안 되지."



"...사형...그,건..."



"탈출은 했지만 한쪽 눈을 잃었고, 너를 찾아댔지만 찾지 못했어."



"……."



"몇 달이 지나서야 네 소식을 들었지. 아성. 내가 참을 수 없었던 게 뭔지 아나?"






얼마의 시간이 지난 걸까.

제가 뱉어낸 피비린내와 숨결로 정신이 아득한 아성은, 피로 물든 자루를 저 멀리 내던지는 명루를 환상처럼 바라보았다.





"왕천풍! 네가 날 버리고 간 곳이 그놈의 품이라니...참 재밌더군."



"..죄송,ㅎ..."



"사죄는 너무 늦었다."






점성 짙은 혈액이 적신 턱. 그림자만 보아도 특정할 수 있을, 아성의 턱선. 기꺼이 우겨 쥐고 알려주었다. 엄지손가락으로 입술을 엉망으로 비벼 닦은 명루가 물어뜯는 것처럼 키스해왔다. 모든 게 잘못됐다. 왕천풍은 애초부터 계획적으로 명루를 제거하기 위해 일을 꾸민 것이다. 명루가 자신을 오해하고 있건, 의도와 상관없이 원망하고 있건. 그런 것 따위는 중요치 않다. 그는 버려졌고, 눈을 잃었으며 아성을 빼앗겼다. 그럼에도 살아났다. 연옥과 같은 세상을 견디고 있는 것이다.



고개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아성의 머리칼을 한차례 고쳐 쥐고, 그는 먼지가 피어오르도록 세게 소파로 처박았다. 봉제선이 뜯긴 인형처럼 맥없이 처박힌 아성이 멍한 눈빛으로 그를 우러러보았다. 뼈가 으스러진 것 같은 허리 위로 숨결이 다가왔다. 모스크바의 한파가 온전히 심장에 꽂히는 것만 같다. 머리채를 잡힌 채, 그의 얼굴과 마주하게 된 아성은 느릿느릿 눈물을 흘렸다.





"네 아름다운 눈동자를 아꼈다. 아성, 넌 마치……."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명루는 말을 아꼈다. 피로 엉긴 속눈썹에 깊이 입을 맞추나 싶던 그가, 두려움과 슬픔으로 부릅뜬 아성의 눈두덩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숨결하나 마음대로 쉴 수 없을 만큼 극렬한 공포와 충격이 아성을 짓눌렀다. 차마 감기지 못하는 눈동자, 그리고 흐르는 눈물. 주변의 혈흔까지 명루의 혀끝이 핥았다. 안구에 닿아오는 꺼끌하고 뜨거운 촉감에 아성은 사지를 부르르 떨며 다시금 뜨거운 눈물을 흘려보낸다.




"묻지.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아,ㄴ..."




의식이 아득한 땅속으로 꺼진다. 몸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고, 그 위에 죽음에 병든 사내가 올라타 숨을 죄고 있었다.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그의 말이 맞다.

이곳은 분명 살아갈 이유가 있는 땅이 아니던가.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비록,

지옥이라 할지라도.







"구원하라."







넘 핏내 + 앵슷허네. 약간 쌍독과 루성의 범벅이랄까.

마지막 구절은 올드보이에 등장해서 유명해진 잠언 6장 5절입니다~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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