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으로 꽃이 피고 양광阳光마저 따사롭게 만물을 비추니, 황상의 표정도 더없이 흡족한 기색이다. 이번 능행에 황실 일원을 다수 대동하여 유대를 다져야 한다고 귀띔한 이가 누구던가. 듣기로는 귀비 월 씨의 수완으로 자리가 마련되었다고 했다. 황자와 비빈들은 물론, 한자리에 모이기 쉽지 않은 종친들도 다수 얼굴을 비쳤으니 행궁行宮에도 분주한 기색 그득하다.


단지 유일한 결缺이라면, 내명부 수장이자 황실의 안주인인 황후의 부재를 들 수 있다. 황후께서 며칠 전 고뿔로 인하여 병상에 누웠으니 오늘 능행에도 따르지 못한 차라. 황궁을 나서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황상의 곁을 지키며 시중드는 이는 황후가 아니라 월 귀비가 되었다.




"말들이 목 좀 타겠는걸."




마사馬舍에서 모습을 드러낸 청년이 손 털며 중얼댔다. 퍽 날렵한 눈매에 위로 곧게 뻗은 눈썹. 한눈에 보더라도 태양 빛 아래 보기 좋게 그을린 낯색이다. 임수는 공신이자 적염군 수장인 임섭 장군의 자제로서, 부친의 피를 물려받아 무예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 성정 또한 불같고 거칠 것 없는 반면, 복잡한 정사政事나 황궁 암투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을 정도로 순수한 인물이기도 했다. 


오늘만 해도 귀비와 황후의 세력들이 저마다 황상의 환심을 사거나 서로를 견제하려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임수는 그런 것은 애초 알지도 못하였다. 그저 간만에 마주한 친족들이나 황실 어른들과 담소를 나누고 행궁 주변을 말 타고 달리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를 뿐이다. 


그는 군졸들에게 명을 내리는 대신 손수 물을 떠 와 저가 타고 달렸던 말을 씻기고 목을 축여주리라 생각했다. 헌데, 물동이를 찾아 헤매다 비교적 외진 풀밭에 이르자 낯선 말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평범한 대화라 여겨 지나치려 했으나 그 기색이 점점 분기를 더해간다. 임수는 별생각 없이 막사 옆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앞을 살피었다.




"으응? 경환 형님?"




적빛 포袍는 소매로 휘황스런 황룡 자수가 놓였다. 격한 손짓 덕에 너른 소매가 춤을 춘다. 황자들 중에서도 유독 왜소한 그였으니, 뒷모습만 보더라도 경환의 존재를 알아채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앞에 고개 숙인 환관 서너 명에게 잔뜩 성을 내고 있다. 풀 밟고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기색도 모를 만큼 노한 것이 아닐까. 대뜸 바로 지척까지 다가와 예를 올리자, 그때서야 눈길을 준다.





"형님. 이들이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네놈이 무슨 상관이냐. 또한 내가 허락지도 않았는데 어디서 형님 형님 거리는 거지?"


"제가 너무 반가운 마음에 그만....결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예왕誉王, 소경환. 현 황후의 유일한 후사였으나 그 또한 양자였다. 예왕의 품행은 흠잡을 곳 없고, 영민하단 칭송이 끊이질 않고 따라붙었다. 그러나 황상의 앞이 아니면 때로 신경질적인 면모를 보이는 덕에 아랫것들에게 평판이 좋은 것만도 아니다. 임수는 죽을죄를 지었다는 듯 읍소한 환관들을 살피고, 다시 경환을 응시했다.




"예왕 전하. 이들이 잘못했다 하여도 지금은 사방이 노출되어 보는 눈이 많으니..."


"임수. 지금 내게 훈계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아아- 형님. 제가 그럴 리가 있겠,"


"그리 부르지 말래도!!"




경환이 연장자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정작 체격에 있어서 임수를 앞지르긴 힘들어 보인다. 그새 호칭을 멋대로 불러버린 임수에 핏대를 세우며 성을 낸다. 으으. 귀를 절로 틀어막은 임수는 제게 삿대질하며 분기탱천한 청년을 고스란히 당해주고 있었다. 눈짓으로 환관들에게 어서 물러나라는 신호를 보낸다.





"네놈은 근본부터 틀려먹었다. 칼 휘두르는 것밖에 할 줄 모르니 법도와 예식 따위 다 버리고..."




형님께선 도통 살이 오르질 않는군. 

그래도,




"네가 얼마나 나를 우습게 봤으면..!!"




이리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형님.


 


-





행궁 주변으로 은행목이 자리했다. 적어도 수백 년 자리를 지켜온 거목巨木이었으니 지나치는 이들의 시선도 남다를 것인데, 임수는 민첩한 몸짓으로 순식간에 타고 올라 자리를 잡았다. 그늘을 지붕 삼아 오침午寢이라도 취할까 싶던 차. 흙바닥 밟는 소리에 한쪽 눈을 떠낸다. 콧노래 부르던 기색 서서히 잦아들이고 귀를 기울였다.





"그러니 다 부질없는 소리란 것 아닌가. 태자? 꿈도 꾸지 말라고 하게."


"이보게. 그래도 황후가 아끼시는 마음 남다르시지 않나."


"그럼 뭐하느냔 말일세. 친모는 이미 비명횡사하였고, 폐하께서도 그 일은 입 밖으로도 꺼내지 못하게 하시는데."


"소문이 모두 사실인지...."


"활족滑族의 피가 섞였단 말이지. 폐하께서 궁으로 들이신 것도 그저 측은지심에 의한 것일 뿐."


"그래도 아까는 심장이 내려앉았네. 하필이면 예왕 전하와 맞닥뜨렸을 건 또 뭔가."





어찌 낯익은 자들인가 했더니, 그들은 분명 오전에 경환 앞에서 꾸지람을 듣던 환관들이었다. 상체를 슬그머니 일으킨 임수가 아래를 지켜보느라 미간을 찌푸린다. 대관절 무슨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것인지. 어느새 몸을 뒤집어, 나뭇가지에 엎드린 채였다. 사지를 허공에 덜렁이며 늘어진 청년이 물끄러미 까아만 정수리들을 훑는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생전의 영롱공주와 판박이라고 하더군."


"자네가 직접 보기라도 했단 말이야?"


"소문일세 소문! 그 눈 속에 세상을 집어삼킬 야욕하며, 또 생긴 건 어떻고. 활족은 반반한 낯짝 가지고 사람 꾀는 재주가,"





눈앞으로 불쑥, 회금빛 몸체가 내려앉는다.





"그러니까 그게 형ㄴ..., 아니지. 예왕 전하에 대한 소문이란 말이지?"





나무껍질 묻어난 손을 탁탁 털며 앞을 가로막았다. 한 치는 너무 놀라 엉덩방아를 찧는가 하면, 남은 한 명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무작정 엎드려 용서를 청했다. 흐트러진 군장을 대강 매만진다. 임수가 그들의 앞에 섰다.




"역시 아직도 멀었어."


"..요,용서를...구합니다. 부디..!!"


"형님이 괜히 화를 낼 분이 아닌데."





펼친 손등, 힘줄이 들어선다. 어느새 주먹이 쥐어져 있다.





-






"되었다. 저리...치우거라!"


"하오나 전하,"


"다 필요 없..대도."




문턱을 넘다 그대로 넘어질 뻔하였다. 뒤에서 만류하는 손길 뿌리치고 계단을 밟아 내린다. 경환은 낯이 붉고 호흡 또한 불안정했다. 이기지 못할 술을 마셨으니 이 또한 자명한 일일까. 아마 황후께서 계셨다면 당장에라도 이를 바로잡았겠으나, 이 넓은 행궁 어디에도 꾸짖어 이끌어 줄 이가 없다. 


행궁 내에서 괜스레 부황의 눈 밖에 날 짓을 해선 안 된다. 보는 눈 많은 곳이니 행동을 조심해야 하는 것도 맞았다. 살아오며 지겹도록 스스로 각인하고 종용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오늘의 경환은 세상만사 잊고 거나하게 잠들고만 싶었다.




'비천한 활족의 피가 흐르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다. 간사한 월 귀비가 퍼트린 헛소문일 테지. 콧방귀 낄 가치도 없는 거리라 되뇌면서도, 도통 잊히지가 않았다. 어디서 그런 허언을 퍼트리느냐 다그쳤으나 끝끝내 답을 듣지 못하였다. 그저, 그저 오래전부터 떠돌던 황궁의 비설祕說일 뿐이다…. 겨우내 추궁한 답을 가지고는 만족할 수 없다.


모친에 대해 물을 때면 짐짓 태연하게 눈을 감고도 말 한마디 열지 않으시는 부황이다. 의문은 곧 원망과 갈증으로 바뀌어 경염을 살게 했다. 모두 다 파헤쳐내면 될 일이다. 두고 보거라. 이 소경환, 반드시 태자의 자리에 올라 보위를 이어받을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형님!"


"……."


"취하셨습니까? 연못에 빠지시겠습니다."





팔을 낚아챈 힘에 고스란히 졌다. 눈 감은 채 비틀대던 경환은, 목교木橋 중간에서 저를 꽉 붙들고 있는 청년을 발견한다. 취기로 흐리멍덩했던 시선이 날 세워 노렸다.


임수. 임수! 밀어내도 밀리지 않고, 등 져도 사라지지 않는 녀석. 세상 걱정 하나 없다는 듯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족속들. 그들은  곧 독이었다. 대하고 보는 것만으로 심중을 병들게 하는...그런 독毒.





"또 왜 찾아왔느냐. 부황께 일러바칠 거리라도 찾으러 왔어? 네놈도 태자 쪽에 붙어서...,"


"어어! 그쪽은 위험하대두요. 이리 오세요. 예?"


"..놔. 놔라, 너는...! 너 따위가....감히.."


"예에. 그러게 말입니다. 저 같은 놈이 형님 몸에 손대는 날이 오고 말이죠."





고분고분한 어투로도, 사실 허리에 팔을 감아 당기는 힘이 상당하다. 임수는 휘청이는 몸을 끝끝내 난간에서 떼어내고 다리 건너편으로 부축했다. 머리 위 쏟아지는 양열陽熱이 혹독하다. 경환은 온몸으로 찾아든 현기증에  무릎을 무너트렸다. 품이 곧 그림자 되어 얼굴을 감싼다. 





"그러게, 왜 이리 과음하신 겁니까. 형님은 체력부터 키우셔야 합니다."


"..다, 죽ㅇ..."


"……."


"임수..내가, 왕위에...오르면...."






이 품 하나로 모두 피할 수 있을까. 아니 될 일이다. 결국은 다시 나아가...걸어야 한다.

경환은 몸 가누지 못하여 울면서도, 




"다 죽일, 것이다."




멈추지 않는다.








알티 이벵 당첨되신 당구님 리퀘입니당 임수경환!

기왕 대신 경선 태자 설정으로 써보았습니당.

이벤투 참여해주셔서 감사해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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