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무리가 스러진 이후 시간이 훌쩍 지났다. 사방에서 추적해오던 이들 중 대부분이 운명을 달리했다. 수십이었던 무리가 열댓 명으로, 다시 대여섯 명으로. 말에서 내려 내달릴 즈음엔 쫓는 이들도 더는 보이지 않는다. 품에 안긴 몸체가 혹여 떨어지기라도 할까, 가슴에 빗겨 둘러맨 끈을 단단히 조여 묶는다. 


이서군. 이 벽촌에까지 발길이 닿을 줄 몰랐다. 저 역시 수 년 찾아 헤매 당도한 땅이 아니던가. 밤 사이 습격이었으니 최대한 마을에서 떨어진 곳으로 말을 내달렸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무참히 도륙내는 칼 끝으로 무고한 이들이 목숨을 빼앗겼을 것이다. 


어찌 알아냈단 말인가. 어르신의 도움을 받았단 말인가. 그것도 아니면, 아니라면 이미 그 분의 존재까지 모두 파악하고 있단 뜻일까…. 녹푸른 대竹 사이를 스치던 와중 귓바퀴로 통각이 스치운다. 아슬하게 피해간 화살은 대나무에 그대로 꽂히었다. 시뻘건 화살깃이 끄트머리에서 옅게 진동하고 있다. 



"길선미!"



성미가 급해 말에서 내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활을 바닥에 내던진 사내가 한달음에 거리를 좁혀 달려온다. 품에 잠든 아이는 여즉 눈을 뜨지 않았다. 빠르게 몸을 돌려 검 움켜쥔 손을 올려든다. 거기서 그만 멈추란 뜻이다. 길태미는 먼 길 쫓아온 중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눈에 생기가 그득했다. 광기라고 봐야할까.



"거기 서라. 응? 니가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


"어찌해서 나를 쫓는 것이냐. 개경에서의 연은 그만 잊어라."


"후레자식. 다 내팽게치고 사라지더니 고작 한다는 짓이 이런 거야? 계집한테 눈 멀어서,"


"입. 다물거라."


"통정이라도 한 거야?"



길태미는 새빨간 답호에 암적빛 요대腰帶를 착용했다. 빽빽하게 들어선 대나무 숲에 도사린 그 모습 극명한 대비를 이루어 꿈처럼 아득한 느낌을 주고도 남았다. 고운 빛 먹인 눈초리가 품 안의 아이에게로 향하자, 선미는 더 참지 아니했다. 발검하자 칼끝이 차겁게 식어 공명한다.

통정通情. 통정이라. 아우는 모진 말의 매듭이 어디인지 알고는 있을까. 



"함부로 입을 놀리면 단명短命하는 법이지."


"웃기고 있네. 내가 너 따위한테? 애새끼나 둘러업은?"


"……."


"그냥 계집도 아니고, 궁에서 도망친 행실이라니 빤하지. 귀의歸依하겠다더니 고작 계집년 기둥서방 노릇하느라 예까지 내려와있는 거야? 정말 그래?"



바람이 스스하게 인다. 어깨맡 내려든 머리칼이 나부끼나 싶을 때, 선미는 지껄이고 있던 그를 향해 걸음을 내딛는다. 그런가 싶더니 높이 도약하여 찍어 누르듯 검을 놀린다. 재빨리 쌍수검雙手劍을 꺼내어든 길태미가 응수했다. 검은 틀림없이 막아냈으나, 힘에서 차이가 있으니 반 걸음 정도 몸이 밀리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는 듯하다. 



"예전만 못하다? 몸이 무겁네."



실로 그러했다. 혼자된 몸이 아니라 마음처럼 민첩하게 몸 놀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순간 길태미 두 눈에 독기가 들어선다. 아우가 품 속 아이에게 무서운 마음을 먹었다고, 그리 깨닫는다. 짧은 검 끝이 기민하게 허공을 가른다. 자칫 늦었다면 보자기에 싸여있던 몸이 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단지 겁박하기 위함일까. 그러나 눈에 불을 켜고 재차 덤벼드는 기색은 결코 허튼 것이 아니다. 어린시절부터 대련하여 단 한번도 진 적이 없는 상대였거늘. 그럼에도 길태미가 저리 득의양양했던 이유가 짐작된다. 


죽이기 위한 검. 지켜야 하는 검.

후자의 심중 무겁고 무뎌 낭패를 보는 일은 수도 없다. 무림武林에서 그처럼 스러진 별들이 하늘을 매웠다. 길태미. 네가 진정 그럴 각오로.....,



"정신 똑바로 안 차리냐? 이제 안 봐준다."



악에 받친 음성이었다. 불그스름한 눈 그림자가 감돌고, 호흡 한 올에 분기가 피어오른다. 제발 저를 두고 떠나지 말라 애원하던 얼굴 그대로다. 잠에서 깨어난 아기가 몸을 움직여 중심이라도 잃을까, 받쳐든 한쪽 손을 도통 놓을 수 없다. 곧게 늘어선 대나무 사이사이로 몸을 피하며 막는 것도 한계가 따른다. 길태미는 틈을 주지 아니하고 오른쪽 어깨 부근을 향해 힘껏 내질렀다. 순간 울컥하며 더운 숨이 몰렸다. 퍽 깊숙하게 찔린 것인지, 칼끝이 빠져나올 때 얼굴로 붉은 혈흔이 튕기었다. 


한 쪽 무릎이 꺾일 것도 같았으나, 각고의 노력으로 버텼다. 칼등으로 근접한 이의 명치를 내리치고 겨우내 거리를 조금 벌린다. 검을 지지대 삼아 버틴 선미는 눈앞 상대에게만 온 신경을 쏟았다. 재차 공격해 오는지 놓치지 않기 위함이라.



"아이는...아이,는. 죄가 없다."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하나만 묻지."


"날 여기서 죽이고....도화전엔 네가 날 넘어섰다 그리, 전ㅎ....,"


"내가 묻겠다잖아!!!! 거짓 없이 답해라. 응?"


"단지. 그분과 아이는...살려주시게."



안고있던 몸에 손길이라도 닿을까. 결연한 기색이다. 기가 찬다는 듯 실소한 길태미가 거리를 좁혀 다가왔다. 두 형제 간만에 대면하여 오로지 비릿한 피내음이니 이 무슨 비참悲慘일까. 울기 시작하는 아이의 얼굴을 쓸어보고, 그 이목구비를 낱낱이 살핀다. 마치 피붙이의 것과 닮은 구석이 있나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 된 것만 같았다.



"길선미. 이 아이...."



조금이라도 손아귀로 힘주어 잡는다면, 가냘픈 목덜미가 그대로 꺾일 것이었다. 진녹색 그림자가 발치에 축축히 젖어났다. 



"네 씨앗이냐?"



숨소리 싣고 바람이 몸통을 흔들어, 대나무가 저들끼리 잎을 부대끼며 스슷-스우━ 울음을 내뱉는다.

죽음竹陰에 맞닿아, 두 형제가 주저앉는다.



* 죽음竹陰
대나무 숲이 무성하여 된 응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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