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아래 풀 내음이 그득했어요.

어린 양 백기는 정신없이 쫓던 나비가 어느새 사라졌다는 걸 깨닫고 시무룩했지만, 주변에 돋아 있는 폴리나 새싹들이 백기의 마음을 달래주었어요.



“정말 아름다운 나비였는데.”


오색찬란한 빛깔을 뽐내던 날갯짓에 눈이 멀어 한참 뒤쫓아 왔건만. 마치 백기를 약 올리는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진 나비였어요. 초원에서 함께 풀을 뜯던 친구들과 가족들을 멀리 등졌지만, 아직 어린 흰 털의 양은 별다른 걱정이 없어 보였죠.

백기는 복슬한 흰 털이 온몸에 뒤덮여 있고, 크림빛 뿔이 이제 막 돋아나기 시작한 어린 숫양이었죠. 원래 산양들의 주 서식지는 여기서 제법 떨어진 무냐Moonya 초원이었는데 요즘은 볕이 좋아 먼 곳까지 산책에 나서는 경우가 많았어요. 어른 양들이 내세운 안전지침에 따르면, 최소한 한 마리의 보호자가 보살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세 마리 이상이 무리를 지어 다녀야 한다고 했지만 대부분 백기 또래의 어린 양들은 그것을 지키지 않았답니다. 촉촉한 땅을 밟으며 힘차게 뛰어다니고, 뜨거운 콧숨을 내뿜는 혈기가 그들의 타고난 본능이니까요.



호기심 많은, 새하얀 털의 산양. 백기는 킁킁거리며 폴리나 새싹들에 코를 묻었습니다. 정확한 이름은 알 수 없지만 백기는 이 언덕에도 와 본 기억이 있었습니다. 돌아가는 데엔 별다른 문제가 없을 거야. 생각하면서 풀을 뜯는 데 열중하느라 얼마나 시간을 보냈는지 모르던 차였죠. 그때, 백기의 하얀 등털 위로 서서히 주홍빛 노을이 들어찰 즈음에 말이죠. 아주 먼 곳에서 작은 소리가 났어요.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대신 힘찬 다리와 뛰어난 청력을 지닌 양들은 사소한 소리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답니다. 그런 백기의 귀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린 것이었어요. 울음소리는 아주 길고, 낮았어요. 분명 멀찍한 곳에서 나는 소리인데 왜 이렇게 온몸이 떨려오는지.

그때서야 엄마가 늘 일러주던 말이 떠올랐어요. 무냐 초원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다른 지역에는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호시탐탐 이빨을 숨기고 있는 맹수들이 많다는 것이었죠. 우뚝 멈춰 선 백기의 표정엔 긴장감이 역력했는데,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백기는 재빨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어요.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큰일이 날 거야.”

“엄마한테 혼이 날지도 모르겠는걸.”


중얼대며 걸음을 재촉하는 백기의 뒤로 검은 먹구름이 따라붙고 있었어요.

백기는 정말 알지 못했을까요? 오늘은 무냐 초원에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분홍빛 코끝으로 가쁜 숨이 쏟아졌어요. 백기는 기다란 속눈썹까지 모두 젖어버려, 제대로 앞을 보기가 힘들었어요. 내리치는 빗줄기와 함께 사방에서 불어닥치는 바람 때문에 금방이라도 몸이 휩쓸려 날아갈 것만 같았답니다.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백기를 쫓아와 휘잉, 휘잉 무서운 소리를 내는 비바람에서 멀어질 수 없었죠.

삽시간에 주변이 어두워지고 번쩍거리며 하늘이 쪼개졌어요. 천둥과 번개, 비바람을 한꺼번에 몰고 온 것은 심술 맞은 폭풍우였답니다. 하지만 아직 폭풍우를 만난 적 없는 백기는 이게 무슨 조화인지도 모르고 겁에 질려버렸죠. 엉엉 울다가 멈추고, 다시 겁에 질려 내달리기를 수십 번 했을 때 결국은 어딘지도 전혀 모르는 낯선 숲 속에 들어와 있었죠. 두 팔을 벌리고 허리를 구부린 나무들이 모두들 백기를 내려 봅니다. 머리를 감싸 쥐고 엎드린 백기가 훌쩍훌쩍 울었어요.


“집에 가고 싶어...무냐 초원에,”


혼잣말을 중얼대던 백기는, 콰르릉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천둥소리에 비명을 지르며 얼른 몸을 움직였어요. 혼비백산해서 보이는 대로 마구 뛰기 시작했죠. 부러진 나뭇가지가 널려있고, 가시덩굴이 둘러친 낮은 비탈을 힘든 줄도 모르고 내달렸습니다. 그리고는 시꺼멓게 벌어진 입구 앞에까지 다다랐어요. 헐떡거리며 숨을 모아 쉬는 백기의 가슴 털과 가련하게 떨리는 두 개의 뿔, 자잘한 돌이 박힌 발굽에서 물이 주룩주룩 흘렀습니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르겠지만, 그득하게 젖은 눈동자를 깜빡이던 백기는 비틀대며 동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곳이었죠.

굴은 생각보다 깊어서 열 걸음이 넘게 들어갔는데도 끝이 나오질 않았어요.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벽을 기어 다니는 거미들의 잔털이 스치는 것까지 느껴질 정도로 백기는 긴장했답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마침내 동굴 끝에까지 도착했을 때, 백기는 이 공간 안에 자기 혼자만 있는 게 아니라고 느꼈어요. 컴컴한 동굴 구석에 웅그린 무언가가 있었거든요. 덩어리는 백기보다 훨씬 크고 검었어요. 푸른 호수빛 눈동자를 빛내며 백기가 눈을 부릅떴습니다. 땅에 앞발을 몇 차례 구르며 용감한 어른 양들의 흉내를 냈지만, 사실 백기의 눈에서 눈물이 여러 방울 떨어지고 있었죠.

커다란 덩어리가 움직였어요. 땅바닥 가까운 곳에서 한 개의 검은 눈동자도 함께 들렸죠. 백기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 몸이 갑자기 앞으로 튀어나와 백기의 몸을 콱 찍어 내리눌렀습니다. 놀라고 겁에 질려, 이미 기운이 다 빠진 백기는 작게 비명을 지르고 눈을 감았어요. 당장에라도 검은 괴물이 백기를 잡아먹을 것 같았거든요. 양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크고, 묵직한 발이 지그시 목덜미를 내리누르고. 얼굴이 다가왔어요! 숨에서는 흙냄새와 비릿한 내음이 함께 맡아졌어요.


“너는 누구지.”

“나는, 난 무냐 초원에서 온...,”


나는 무냐 초원에서 온 백기야. 하얀 털의 산양이지. 모두에게 하곤 했던 말이 도무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어요. 가까이서 만난 얼굴은 백기도 몇 번 본 일이 있었거든요. 사슴 친구들이, 비슷하게 생긴 짐승들에게 끌려가는 걸 봤으니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큼 무서웠어요.

꼼짝하지 못하고 덜덜 떨고 있는 백기를 바라보면서, 매서운 발톱의 주인이 흐음. 하고 낮은 숨을 쉽니다. 눕혀진 채 앞발을 허우적대며 우는 작은 동물. 몸에서는 풀 내음과 비 냄새가 같이 났죠. 이빨이 날카롭지도 않고 갈고리 같은 발톱은 애초에 보이지도 않았어요.



“나를 잡아먹지 않..을 거야?”

“폭풍우가 쳐서 여기 들어온 것뿐이야.”

“폭,풍..우?”


두 걸음 뒤로 물러나, 빤히 저를 보고 있는 몸에 물었습니다.

밖에서 널 괴롭힌 녀석들 말이야. 중얼대며 젖은 털을 고르는 짐승의 이름은...아! 그래. 백기는 이제 확실히 기억났어요.



“늑대다.”


맞아요.

녀석은 흙빛의 털을 가진 늑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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