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은 상해에서였다.


“다들 신분증을 내놓도록 해.”


당시 옥윤은 의뢰를 받고 타겟을 미행 중이었다. 아열대 폭풍 영향을 받아서 날씨가 아주 고약했는데, 들어선 카페에는 우아한 브람스의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상해 미라보. 커피가 맛있는 곳이라고 정평이 나 있길래 겸사겸사 커피를 시켜봤지만, 옥윤의 입맛에는 차지 않았다. 그리곤 난장 부리는 야쿠자 무리를 지켜보던 차에, 프랑스 경관이 쳐들어와 신분증을 요구한 것이다.

옥윤을 미라보 앞에 내려주었던 작전 차량은 밀입국 일정을 알아보기 위해 떠난 상태라 더 이상의 지원이 불가능했다. 그러니까 속사포 동지. 내 중국 신분증도 만들어 달라니까. 왕페이. 얼마나 평범하면서 그럴듯한 이름인가!


경찰들이 테이블을 오가며 신분증 확인을 시작하자, 옥윤은 평온한 표정으로 나이프를 집었다. 테이블 아래 넣어둔 모신나강으로 응수하기엔 동선이 맞질 않았다. 아마 수상한 자로 몰려 총기를 꺼내기도 전에 제압당할 테지. 이 정도 실전은 아무것도 아니다. 눈을 고고하게 내리깐 그녀가 경찰들의 행동을 예의 주시했다. 그리고 소맷단 안으로 나이프를 밀어 넣는 순간, 부츠 아래로 찾아드는 손이 있었다.

들이닥친 경찰들에게 쓰기 전에 남자에게 먼저 나이프를 써야 할까. 고민하던 차에 남자는 동포끼리 돕고 살자고 말했다. 어눌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분명한 모국어였다. 몸을 일으킨 남자는 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눈빛은 여유로웠으며 몸에서 포마드 잔향과 러시아제 오드뚜왈렛 냄새가 짙게 풍겼다. 뭐하는 작자지? 그를 노려보면서도 섣불리 행동하지 못했던 옥윤은 어느새, 어깨동무한 남자의 품에 잠자코 앉아 있었다. 코앞까지 다가와 신분증을 요구하는 경찰 덕에.


“진짜 부부인가?”

“…네.”


천연덕스럽게 대꾸한 안옥윤. 아니 왕페이는 남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던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운명적 동지애는, 곧 현실이 되었다.




. . .




접시는 바이올렛 컬러의 잔꽃이 그려져 있다. 옥윤이 화신백화점에서 두 시간을 심사숙고한 후에야 값을 지불한 접시세트 중 일부였다. 찻잔과 타원형 접시도 있었다. 시간이 바쁜 탓에 오늘 아침의 풀 세팅은 생략하기로 하자.

뜨거운 토스트를 거의 던지듯 접시에 놓았을 때 주방 입구에서 기척이 있었다. 코트를 팔에 걸쳐들고, 손에는 신문을 쥔 남성이었다. 남편은 오늘도 출근 시간이 촉박한 듯 보였다.


“내 건가? 땡큐.”

“그냥 드시고 가세요.”

“부인 성의는 너무나 잘 알지만, 사무실에 출근하려면 시간이,”

“먹고 가요. 당신이 사장인데.”

“…….”



몸을 기울여 옥윤의 이마에 키스한다. 은근슬쩍 넘어가려던 남편이 한동안 옥윤을 바라봤다. 피하지 않고 눈을 깜빡이며 기다리자, 결국 남편이 헛기침하면서 의자를 끌어당겨 앉는다.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하 건. 33세. 현재 탐정 사무소를 운영 중이며 결혼 2년 차 옥윤의 남편이기도 하다. 흐음. 음. 음...식빵에 잼을 발라 먹는데도 대단한 미식품평처럼 음미하는 남자. 눈을 내리깔아 밋밋했던 눈두덩은, 막상 다시 위로 올려트리면 쌍꺼풀이 생겼다. 양쪽 라인이 묘하게 다르니 분명 바람기가 다분할 거라고 결혼을 말린 동료들도 있었다.

저거 관상 자체가 사기꾼 관상이야. 특히 추상옥은 하 건의 'ㅎ'자만 나와도 손사래를 치면서 학을 떼는 거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옥윤은 이전과 다름없이 본인의 의견을 관철했고. 상부에선 안옥윤 상등병의 결혼추진 및 신분위장을 위한 밑 작업을 하느라 제법 노력했다.

결혼함으로써 안정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물론 신분위장에도 더 큰 도움이 된다. 어떤 단체에 속한 것도 아니며 개인 탐정사무소를 운영하는 건은 심히 보수적이지도 않았고, 간섭하는 법도 없었다. 탐정을 한답시고 아침 일찍 나가 자정이 넘어서 들어오기도 하고 아예 외박하는 경우도 잦았다. 거기다 어지간해선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강심장이기도 하다. 귀찮게 굴지 않으면서도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상대. 완벽한 (위장)남편감 아닌가.


“음. 이 부분이 좀 탔군.”

“어디요.”

“이곳. 아래쪽에서 왼편으로,”

“어두워서 그래 보이는 거겠죠. 멀쩡한데요.”

“…그래요.”


분명 새까맣게 타 있었지만 옥윤은 인정하지 않았고, 건은 못내 허허허 웃으며 남은 조각은 단박에 입안으로 쑤셔 넣었다. 먹는 것만큼은 복스럽게 먹는다 큰 칭찬을 받았었다.

당시 옥윤의 어머니 역할을 대신 해주었던 상관. 코드명 '아네모네'대령은 그를 본 소감이 간단명료했다. 잘 먹는단 것이다. 속사포의 의견과는 상반되게 그녀가 말하길, 음식을 귀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을 따르면 밥 굶을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그 말은 결론적으로 틀리지 않았다. 대체 탐정 일을 해서 얼마나 벌이를 하는지 모르겠으나 옥윤은 제 벌이 외에도, 남편을 통해 부족함 없는 중산층 생활을 누리고 있었으니까.


“탄 맛이 나는데.”

“…….”

“내 미각이 잘못된 거겠죠 부인? 다녀올게.”


문제는 다른 데서 발생했다. 이걸 문제라고 다뤄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어쨌든 두 사람은 명백한 권태기 부부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던 것이다. 아이도 없고 겨우 결혼 2년 차에 접어들고 있으면서, 의무적인 예의와 배려 외에 부부만의 특별한 유대가 느껴지지 않았다. 숨소리만 들어도 곱지 않다는 게 이런 걸까. 웃는 낯색으로, 이번엔 옥윤의 입술에 짧게 버드키스한 건이 끝끝내 탄 맛을 운운하며 몸을 돌린다.



“저녁은요?”

“8시까지 올게. 오늘도 고생해요.”

“그래요.”


답하면서, 빵 부스러기가 남은 입술을 신경질적으로 닦아냈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자 옥윤은 식탁에 있던 나이프 자루를 손으로 튕겨 공중에 띄웠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낸 그녀가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은 사과 하나로 대신한다.

이쪽이야말로 사무실 출근 시간에 맞추려면 빠듯했으니까.




. . .




- 태랑太琅 자율군, 경성지부.


입구의 김 양이 바쁘게 분첩을 내려놓는다. 거울을 보며 얼굴에 분을 찍어 바르다가, 옥윤의 등장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선 것이다. 뒤따라오며 옥윤이 벗어낸 롱코트와 모자를 받아주고 머리를 묶을 수 있는 머리끈도 기다렸다는 듯 대령했다. 신문사 입구에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우아한 미세스 행색이던 그녀가 삽시간에 분위기를 바꾸었다.



“상등병님! 오늘 좀 늦으셨네요.”

“아니, 커피는 됐고. 내가 부탁했던 건?”

“아아~ 그 홍콩 보류 건 말씀이시죠오.”

“뭐야 왜 또 말을 꼬아.”


계단을 오르다 말고, 옥윤이 뒤를 돌아보았다. 지부원들이 바쁘게 오가는 사무실 속에서 몸을 베베 꼬고 있는 김 양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루즈를 뻘겋게 칠한 김 양은 치장에 관심이 많았는데 저 말하기 곤란한 일이 있거나 잘못을 했을 때 말끝을 죽죽 늘여대는가 하면, 혀를 내밀며 철부지 짓을 하는 거였다.

수십 명의 암살자들이 들고나는 이 공간에서, 몇 없는 여성인력이 옥윤과 김 양이었다. 여성 대원들을 총괄하고 있는 옥윤의 위치에서 모두에게 칼 같은 캡틴의 면모를 보여야 하는 게 당연지사겠지만, 특히나 어린 티를 벗지 못한 김 양에게 호된 훈육을 하는 중이었다. 언젠가 현장요원이 되려면, 지금과 같은 상태로는 영 불가능이니까.


“그게요~ 상등병님께선 홍콩 건 말구 더 중요한 일이 있대요!”

“중요한 일?”

“보안코드 00. 대단하죠? 저는 아예 접근도 못 한다니까요?”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속삭인다. 엄청난 일을 발견한 듯 흥분된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보안코드가 00으로 걸려있는 임무는 옥윤도 몇 번 접한 일이 없다. 어쩐지 느낌이 이상한데.

공간 안에서 각자의 일에 열중해 있는 사람들. 옥윤은 커피를 홀짝거리다가 저와 눈이 딱 마주친 속사포, 추상옥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황덕삼과 말을 주고받던 그가 손을 흔들며 어색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보여주었다. 지부 내에서 소식통으로 일컬어지는 그가 시선을 피하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 된다.

나한테 그걸 맡으래? 머리채를 들어 질끈 묶으면서, 옥윤이 묻는다. 눈길은 여전히 추상옥 황덕삼 두 사람에게 꽂혀 있으면서 그러자, 순진한 김 양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재촉을 했다. 두 사람은 계단을 모두 올라 인적이 드물어진 복도에 다다랐다.



“제 2 회의실 들어가시면 됩니다! 대령님 오셨어요.”

“대령님이, 직접?”


태랑 자율군 연합은, 해방과 동시에 해체되었던 독립군 산하 부대원이나 비영리적 대의를 위해 뜻을 합친 군 간부들로부터 시작됐다. 기존 군의 계급체계는 그대로 유지 되지만 현재는 청부살인, 암살 등을 주목표로 삼아 운영되는 비밀조직이다. 각 분야의 기술자들이 모여있는 조직인 만큼 철저한 통제와 관리 내에서 움직이는데, 미란은 옥윤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준 은사이자 대령직에 올라있는 상관이기도 했다. 두 사람이 각별한 사이이긴 하지만, 옥윤이 경성지부로 발령 난 이후로는 해를 걸러 한 번 만날 정도로 각자 바쁜 삶을 살고 있던 터였다.

옥윤은 아침부터 이상한 일투성이라고 생각하며 회의실로 향했다. 원래 보류되어있던 홍콩 암살 건을 처리하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어째서 갑자기 지시에 변동이 생겼단 말인가? 정말 위급한 일이 아니고서는 흔치 않았다. 그러나 위급상황이라고 보기엔 사무실 풍경은 너무나 일상 그 자체였는걸. 반신반의하며 안에 들어섰다.


“어서 와. 더 예뻐졌구나.”

“대령님.”

“오랜만이지? 경성은 정말 간만이야.”


담배를 빨아들이던 그녀가 웃으며 반겨주었다. 재떨이에 담배를 대려놓자 필터로 플럼계열의 루즈 자국이 묻어나 있었다. 거수경례를 마친 뒤 따스하게 품어오는 포옹을 받았다. 여전한 느낌에 옥윤은 잠시나마 눈을 감고 옛 추억에 빠져들었다. 미란과 함께 수행한 작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것이다.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고, 서로 목숨을 구하기 위해 포화더미에 뛰어든 적도 있었다.

옥윤의 얼굴을 쓰다듬던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옥윤에게도 맞은편 자리를 권하는 덕에 역시 그녀의 건너편으로 착석했다. 대령의 앞에 사각 서류철이 놓여있다. 검은색 라벨이 붙어 있었기에 벌써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았지만, 대령의 표정이 상기되어 있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한복을 고집하는 덕에 홍자수가 놓인 저고리와 붉은 치마가 한눈에 들어왔다. 다시 담배를 빨아내는 그녀의 진주 귀걸이가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다.


“제게 직접 맡기실 일이 있다구요.”

“그래. 우리 쪽에서도 고민이 많았다. 네게 괜한 일을 시키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야.”

“괜찮습니다. 말씀하시죠.”

“하지만 네가 아니면, 너만큼 완벽하게 해낼 사람이 없다는 판단이 섰어.”


파일철의 끝 부분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어간다. 옥윤은 급속하게 가라앉은 회의실 공기가 부담스러웠다. 여태까지 어떤 임무를 내리더라도 이렇게 가라앉은 미란의 목소리는 들어본 일이 없는 것이다. 암살자로서 최고라 자부하며 살아왔다. 한 번 타겟으로 삼은 목표물은 반드시 저격에 성공한다. 저격이 여의치 않으면 근접격투, 사격도 문제없다. 무엇이든 자신 있었다. 그런데 파일철을 열어내는 대령의 손등을 바라보며 대책 없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것은 30년을 격전지에서 살아온 여인의, 아주 기묘한 직감이었다.


“우리의 가장 큰 경쟁세력을 알고 있지?”

“예. 살부계 아닙니까?”

“그래 맞아. 현재 살부계 밀정이 우리 쪽에 침투했다는 첩보가 들어왔어.”


살부계殺父契.

광복 전 일제 시절에 친일파로 변절한 서로의 아버지를 죽이기 위해 5인의 무관으로 결성된 단체. 하지만 말로는 좋지 않았고, 자세한 흐름을 알 수 없으나 광복 후에 전혀 다른 성질의 암살단체로 다시 나타났다. 서로 지하에서 은밀하게 활동하는 비밀조직이었지만, 수요층이 같고 하는 일이 동일한 만큼 크고 작은 충돌이 있어왔다. 서로 임무가 겹쳐 요원들을 죽고 죽이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옥윤과 함께, 미란이 아끼던 제자 중 하나인 선혜 역시 살부계와의 일에 휘말려 전사했다.


“..우리,쪽이라면.”

“경성지부.”


담담하게 대답한 음성에 숨이 막혔다. 온몸이 차게 식어가는 착각에 빠진다. 서류철을 넘긴 대령은 클립으로 고정된 남성의 흑백 사진을 옥윤의 쪽으로 돌려주었다.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성은 묵직한 모직 코트에 중절모를 착용하고 있다. 뒤로 장발의 중년남성이 따르고 있다. 독일산 MP-28 기관단총. 옥윤은 무릎위에 올려놓았던 손을 꽉 움켜쥐었다. 모를래야 모를 수 없는 얼굴들이다.

앞장선 중절모의 남자는 검은 장갑에, PPK 권총을 들고 있다.


“활동명 하와이 피스톨. 33세. 본명 하 건.”

“이,게....”

“현재 살부계 요원으로 추정되며 경성지부 상등병 안옥윤의 남편으로 잠입 중.”


식빵을 씹어 먹던 볼. 거칠하게 돋아난 수염. 8시 저녁 식사를 약속하며 사라진 뒷모습이 떠올랐다. 아닐 겁니다. 아닙니다 대령님. 그 남자는 그럴 위인이...,옥윤은 떨리는 턱을 꽉 다물고 숨을 골랐다. 상해 미라보에서의 첫 만남이 문득 피어올랐다. 후에 호텔 복도에서 마주치는 바람에, 함께 커피를 마시며 마음을 열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가게 되면 꼭 다시 만나겠노라 약속하던 남자가 있었다.


“안옥윤. 하와이 피스톨을 암살해라.”

“…….”

“기한은 지금으로부터 24시간이다.”


기관단총의 남자가, 현재 옥윤의 시아버지였다. 제 동료를 데리고 와서 내게 친부라 속였단 말이지. 눈물이라도 떨어질 것 같던 옥윤의 두 눈이 일순간 빠르게 눈꼬리를 올려들었다. 남편은 때때로 옥윤에게 재미없는 여자라 은근슬쩍 핀잔을 주었다.



“접수 완료.”


틀린 말은 아닌 것이다. 안옥윤은,



“타겟은 오늘 밤 암살당합니다.”


농담 따위 모르는 여자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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