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로暗路의 연속인 나날이다. 금릉의 황궁으로 전령이 줄을 잇고 비보와 호소식이 앞을 다투니, 이는 나라의 국운이 달린 대사大事로서 모두의 간담을 졸이게 하는 것이라.


전쟁이 계속되던 와중 양梁의 황제 소선은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선위하였으니, 뒤를 이어 옥좌에 오른 이가 정왕 소경염이다. 이미 태자의 자격으로 실무를 전담하던 경염은 자칫 혼용무도昏庸無道가 될 수 있는 정국을 꿋꿋이 헤쳐나갔다. 나라의 국운을 짊어진 책무를 부정치 않겠으나, 생사를 함께 약속한 지기이자 반려로서의 결의가 또한 있다.

 

임수林殊.

 



 

"전하! 대유국과 전투를 벌이던 장림군이 대승을 거두었단 소식입니다."

 

"임 장군은, 임수는 어찌 되었느냐."

 




너에게 보여줄 세상이 아직도 광원廣遠한데,

 



 

"아뢰옵기 망극하오나, 난전亂箭에 당하시어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합니다."

 

"병사들이 시체를 수습하려 했지만 그마저 여의치 않는다 하였습니다. 지형이 워낙 험한 탓에 수색하는 데에도 큰 어려움이……"

 

 



그대가 나를 허락지 않는구나.








장 림 곡

長 林 哭









폭염이 극에 달했다. 갈사暍死한 이들은 어미 아비 보다 물 한 모금을 외치다 죽었으니 괴롭고 흉악한 정세이다. 내탕금까지 동원하여 난민을 구제코자 하였으나, 중간 관료들의 폐단으로 실효에 어려움이 따랐다. 대전大戰을 겨우 버텨낸 직후 찾아온 재해이니 황실을 향한 원성도 높아져만 가는 실정이다. 쟁취한 승리를 재기의 발판으로 삼지 못하고, 현 황제는 과거의 시련 속에 사는 듯했다.

 



"예황 군주. 오셨습니까."

 

"오늘도 저곳에 계시는군요."

 


 

몽지와 예황은 성문 밖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각에 서서 대화를 나눈다. 비록 일산日傘을 갖추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찌는 듯한 더위가 한창이거늘. 경염은 성벽을 따라 걸으며 도통 호위도 물리고서 장시간을 저리 보내었다. 금일엔 좀 더 멀리 나아가 호수 근처 풀밭을 거닐고 있으니, 그 방향은 예황에게도 낯설지 않은 곳이었다. 바로 북유국과의 전쟁에 나섰던 임수의 출정 길을 고스란히 담아낸 것이라. 황상의 뒷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애탄을 금치 못하게끔 하였다.





"마음을 잡지 못하셔서 큰일입니다. 친왕 시절 폐하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세상이 무너지는 절망을 겪으셨으니, 무리도 아닙니다."

 

"……."

 

"그것은 군주나 저 역시 마찬가지겠군요."

 

"오라버니가 떠난 지 삼 년이 지났어요."

 


 

 

예황은 애써 목을 가다듬었으나 잘게 떨리는 음성까지 지우지는 못하였다. 임수의 죽음이 전해지고 여러 해가 지났음에도, 그것을 심중의 상흔으로 남기고서 살아가는 이가 태반이다. 절벽 아래 떨어진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했단 사실에 경염은 더 큰 죄책감을 느끼는 듯 보였다. 전장의 백사百事 사람의 욕심 같지 않으니 시체를 찾음에 여러 제약이 따른 것이다. 


그 후로 경염은 넌지시 꿈 이야기를 건네곤 하였다. 목음木陰 우거진 곳 우뚝 선 사내가 자꾸만 저를 부른다 하니, 그를 듣던 몽지로서는 참담한 심정 숨기려 갖은 노력을 해야만 했다.

 

 


"임수. 네가 폐하를 놓아주지 않는 것이냐…."



 

더위에 숨죽은 들풀은 물론이요, 물 내 짙은 주변으로 수초가 틈 없이 자리했다. 개중에 성인 남성의 허리까지 키가 자란 것들도 적지 않아 한눈에 보더라도 시야를 확보하기에 좋지 않다. 명을 받들어 물러나 있긴 하였으나, 더는 방관할 수 없을 노릇이다. 예황과 전각을 지키던 이가 검집에 손을 올린 채 몸을 돌린다. 몽지는 불복으로 형벌을 받을지언정, 황상의 곁을 지키리라 마음먹은 터였다.

 


빠른 걸음으로 호숫가를 향해 이동한다. 박힌 화살처럼 빼곡 들어찬 잎줄기 사이로 경염의 모습이 희미하다. 어쩐지 불안한 마음 감출 길 없어 속도를 높이던 차였다. 지열이 들끓는 초평으로 다급한 고함이 긁힌다. 여럿 호흡을 한 데 섞은 음성이 몽지에게까지 전해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황상이 거닐던 쪽을 살핀다. 나부끼는 금수의錦繡衣, 볕 아래 번떡대는 짐승의 흑모黑毛. 

 



 

"폐하께서, 폐하께서!!!"

 

"어서 금위군을 불러라. 절대 놓쳐서는 아니 된다!"

 



 

기묘한 울음이 호수의 수면을 갈랐다.

검은 짐승에 올라탄 황제가, 쏜살같이 호숫가를 벗어나고 있다.









양광陽光 아래 털빛은 검다 못해 오색으로 빛을 발한다. 작은 기척에 놀란 것도 잠시, 수풀 사이 위려한 자태 뽐내는 갈기가 경염의 눈을 사로잡았다. 금릉의 그 어떤 보화와 천하가인天下佳人도 그의 눈을 사로잡지 못했건만. 물가 근처를 유유히 거닐며 풀 뜯는 짐승이 마음을 붙든 것이다.


본디 말은 예민하기 이를 데 없는 짐승으로, 지척까지 다가온 낯선 이를 보고도 경계하지 않을 리 없다. 헌데 백색 금수의 차림 사내가 제 옆구리를 홀린 듯 쓰다듬었는데도, 별달리 도망하거나 거부하는 기색조차 없는 터.

 

 


"주인이 버린 것이냐."

 


 

손길이 터럭을 쓸어오자, 기다렸다는 듯 푸르릉 콧김을 뿜는다. 묻긴 하였으나, 누가 보아도 뛰어난 풍모 갖춘 명마를 제 손으로 버릴 인사는 없으리라. 더군다나 안장도 얹지 않았으며 고삐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홀로 들판을 달려 사는 짐승이란 말인가.



"길을 잃었구나."

 

 

새까만 몸체 곁으로 근접한다. 말 그림자에 몸을 반 쯤 숨기고서, 머리 위 쏟아지는 콧김을 피하지 않았다. 몸을 허락한 흑마黑馬가 잠자코 저를 바라보니 말을 잃는다. 새까만 눈동자가 영묘함을 내뿜은 탓일까. 흑요黑曜의 결정체인 듯 깊이를 알 수 없을 짐승이다.


커다란 몸에서 내뿜는 체열에 발밑의 아지랑이 전신을 옭아맨다. 너울너울 시야를 흔들기에, 무너지듯 말의 얼굴로 뺨을 기대어 버린다. 짐승 주제에 닳고 병든 심정을 알기라도 할까. 앞발을 움직거린 흑마가 좀 더 고개를 숙여 높이를 맞추자, 경염은 저도 모르게 양팔로 목덜미를 감싸버렸다. 먼 곳에서 스스-스우우─ 풀 베는 발소리가 들린다. 필시 저를 찾으려 흩어진 환관들일 테니 마음이 바빠진다. 마치 주인을 찾은 양 유순하던 흑마가 급작스레 몸을 털고 움직였을 땐, 그때의 경염은 어미 잃은 아이처럼 가련한 행색이 되었다.

 

잡을 고삐도 무엇도 없으니 급한 대로 옆구리를 쥐어 붙든다. 매끈한 털이 약 올리듯 손가락 사이를 스쳐지나니, 헐떡대며 말의 속도를 쫓느라 혈안이 된다. 흑마는 호수 둘레를 더걱더걱 밟아 숲 속으로 향하려 했다.

 


 

"가,지…말거라! 제발. 가지 말아다오."

 



그것은 마치 떠날 이의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린 형상이었다. 애원하다시피 한 음색을 알아들었을까. 갈기를 잘게 흔들어댄 짐승이 처음으로 앞다리를 굽힌다. 황상을 찾아 나선 음성이 하나둘 늘어나자, 재촉하듯 주억거리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눈망울 적신 사내가 기꺼이 곁으로 다가선다. 갈기를 힘껏 움켜쥐고, 말 등으로 올라앉았다. 위치가 드러난 탓에 일제히 이곳을 향해 아우성치며 달려온다.

 

경염은 아무것도 듣지도, 보이지도 않는 듯하다.

3년을 그리 살아왔지.

 


 

"…실은, 나도 길을 잃었다."

 

 


몸을 싣자마자, 흑마는 언제 그랬냐는 듯 우렁찬 울음과 함께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명록색明綠色 대지 한가운데 흑점이 박히었다. 무서운 속도로 땅을 가른다. 말라 죽어가는 땅. 버려진 자가 다스리는 험지險地를.



 






시공時空을 잊는다. 달려오는 내내 한 꺼풀씩 벗어던져 알몸이 된 것만 같다. 기어코 추적을 따돌린 흑마는 지치지도 않고서 발을 놀리니, 고되어 그 위에서 잠들어버린 경염은 끝없을 주로走路를 거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바람에 쓸리고 나뭇가지에 걸린 의관이 흐트러져 처음의 모습 찾을 수 없다. 허리까지 풀려내린 머리카락이 때때로 검은 갈기에 뒤섞인다.

 

 

"어디까지, 갈 셈이냐. 잠시 내려다오."

 

 

자진하여 말에 오른 것임에도 문득 두려운 마음이 든다. 부드럽게 등허리를 쓰다듬으며 부탁하였으나 속도가 줄지 않았다. 씨근대는 숨결이 허공에 흩어져 두 뺨으로 닿는다. 모난 돌투성이인 길을 거치느라 덜컥대며 몸이 요동쳤다. 경염은 보드라운 말의 갈기에 얼굴을 묻어버린 채 눈물을 흘린다. 꼭 붙든 갈기가 어둑한 그림자에 쏘인다.


어느덧 풍경은 십수 번 모습을 달리하여, 지천으로 암녹색 대나무가 빼곡하다. 말을 달리고 또 달려도 이 숲은 끝나지 않을 것 같으니 그야말로 장림長林이 되었다.



"대체 언제까지…나를!"



투광透光한 눈물이 검은 털 위로 맺히어 몸체를 훑고 떨어진다. 속도를 늦추는가 싶던 말의 발굽이 우뚝 솟은 돌부리에 걸린 탓, 급작스레 앞으로 중심이 쏠린 이가 별다른 대비도 하지 못한 채 바닥으로 뒹굴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지친 몸이 엎드러진다. 아득한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얼굴을 들었을 때, 경염은 주변을 샅샅이 살피느라 두 눈을 쉼 없이 움직였다. 흑마의 위세 간데없고 음연陰煙한 죽림이 저를 둘러싼 탓이다.

 

몸을 벌떡 일으킨 자가 사방을 헤매인다. 관자놀이로 피가 흐르고 다리를 절뚝이는 건 애초 모르는 듯했다. 경염은 빛이 일러주는 방향으로 걷고 또 걸었다. 대나무 사이를 헤쳐 나아가면, 필시 길이 있으리란 맹신이 생겨났다. 찾아야 한다. 놓친 짐승을, 잃어버린 길을.

 


"매,장소?"

 

 

날 버린 너를.

 


"…임수."

 

 

빛을 등진 사내가 있다. 나무줄기 휘젓느라 피투성이 된 손으로 우러러, 경염은 주저앉는다. 장림의 끝에야 조우한 길이다. 백옥의 관에 단려한 차림새이던 그림자가 서서히 흑연黑煙에 물들었다. 검은 의복을 갖춰 입은 청년이 미소를 지어 보인다. 길이 열렸다.

 


 

"임수. 네가 맞구나! 꿈에서, 꿈에서 날 찾아오지 않았는가."


"한시도 너를 잊은 적이 없어. 너를 그리 보내고…나는,"



 

나누지 못한 마음 억겁을 달려도 풀지 못하리라. 무릎걸음으로 다가가던 이가 손을 뻗자, 가만히 고개를 내젓는다. 뒤로 물러난 사내를 깨닫고 망연자실한 표정이 되었다. 하나, 둘. 계속해서 멀어지는 발걸음 두렵고 야속하여 쫓는다. 의복이 찢기고 무릎으로 피가 흐르는 것도 몰랐다. 경염은 새카만 옷자락으로 제 몸을 바친다. 앙상한 다리 양팔로 감싸 안고 눈물로써 청하는 것이었다.


 

"제발, 나를…날 더는 비겁한 사내로 만들지 말아다오! 임수. 나를 다시 떠나겠단 것이냐?"

 

 

검은 연기가 어깨너머로 세를 키운다. 쇳소리가 흐느낌을 덮쳐 누르기 시작했다. 경염은 똑똑히 임수의 얼굴을 봐두었다. 동공 속 씨앗처럼 작기만 하던 붉음이 삽시간에 괴마가 되었다. 흑의黑衣의 어깨로 찢기고 죽은 자들이 들러붙는다. 불에 타오르는 육신으로, 그들은 임수를 자꾸만 끌어당겼다. 경염은 지지 않겠다는 듯 몸을 부둥켜안는다. 반쯤 불탄 깃발이 펄럭대며 두 사람을 덮치었다. 이제 화기가 호흡을 막아, 숨조차 쉴 수 없다.

 


 

"아니. 이번엔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 너를 다시 잃고 살아간들 무슨 의미가 있지."

 


 

군기軍旗에 적힌 비명이, 모두 경염에게 달려들었다. 검은 옷의 사내도, 경염도, 악귀처럼 들러붙은 수백 병사들도 한데 엉키어 구른다.

 장림의 끝은, 천 길 벼랑이었구나.



 

"배역背逆의 아들 소경염. 감히 용서를…,"

 


경염은 부러진 깃대 움킨 채 절벽으로 추락한다.

군기는 오로지, 세 글자를 담았다.

 





적 염 군
赤 焰 軍








시호諡號 정황제靖皇帝.

묘호廟號 양 선종梁 宣宗.

 

 

……중략……

 

 

∙정황제의 죽음과 장림곡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 적염군 사건의 원혼冤魂이 벌인 요술妖術인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으나, 임수林殊의 전사 이후 크게 낙담한 정황제가 자진自盡하였단 추측이 힘을 얻는다. 사후 시신을 수습하려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고, 후사를 정하지 못한 양梁의 황실은 혼란을 거듭하며 서서히 쇠퇴했다.

 

‘장림長林’은 길게 이어진 숲을 뜻하는 말이다.

양梁의 멸망 후에도 정황제가 숨진 계절이 되면 그가 몸을 던진 숲에서 기묘한 바람 소리가 들려오게 되었는데, 마치 숲이 울부짖는 듯하여 후세에 이를 장림곡長林哭이라 칭하였다.

 




-結.








랑야방 흑黑합작에 참여한 글입니다
쩌는 합작 전체는 요기에서 보실 수 있어요!  

http://ninrvana-in-dark.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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