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폴리님 커미션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나뭇가지 연둣빛이 어른어른. 자세히 살펴보면, 이제 망울을 틔우려고 준비 중인 벚꽃 가지가 곳곳으로 드리워 있다. 제법 한산한 공원 거리. 서로 앞만 보고 걸은 게 얼마나 되었을까? 코끝이 간질간질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데. 졸업을 목전에 두고 있어서, 아니면 봄이라서, 아니면 밤이라서…. 뒤통수를 긁어대다가 멈칫 걸음을 울린다. 옆에서 맞춰 걷던 그림자가 우뚝 서버렸으니까. 역시 같은 고민에 빠진 얼굴이다.





"있잖아, 우리."




결국 먼저 입을 열고 말았다. 짧게 밀어놔서 잡힐 것도 없는데, 제 이마에서 정수리까지 비비적대던 녀석이 그렇게 목소리를 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쓰윽 밀어 넣고 뒷말을 기다린다. 무심한 표정 지키느라 나름 노력 중이다. 그런데 주머니 속 담긴 손으로 땀이 밴다. 괜히 발끝을 툭툭 차대던 녀석이 한 걸음 불쑥 다가왔다. 둥글대는 회갈색 눈동자 때문에 숨이 막힌다. 언젠가는- 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일 줄은 몰랐지. 나는 졸업식이 끝나면. 그러니까 며칠만 더 있다가,




"사와무라. 너도 예상은 했겠지만."





유키, 설마.





"나는 다이치 너랑.....실은 전부터...."


"뭐?"





다이치...라고.

불렀다.





"다이치. 널 좋아하는데...나는! 그러니까,"





그러니까.





.

.

.







"이젠 좀 일어나. 응?"


"좋아,한...ㄷ.."


"사와무라?"





바람결이 좀 더 옅어진다. 풍겨오는 비누 향에 문득 눈을 떴더니 이게 웬걸. 밤하늘은 간 곳 없고 쨍쨍한 아침이다. 선풍기 앞에서 탈탈 털어 머리 말리던 몸이 기울어진다. 이부자리 엎드려 있던 제게로 직행했기에, 다이치는 얼른 반대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눈만 껌뻑껌뻑이다. 더 시간 끌다간 지각하고 말 거라고 친절하게 어깨를 흔들어주는 녀석이, 네코마 고교 졸업 전의 카이가 꿈에 등장한 아침이다. 이상한 아침.





"꿈을 꾼 건가? 뭐라고 중얼거리던데."


"...어어."


"무슨 꿈이었는데?"


"졸업 저ㄴ.., 아냐. 아무것도."


"싱겁기는."





한숨을 푹 내쉬는 사이 바지를 갈아입었다. 이미 외출복 차림인 카이가 다가와 팔목을 쥐자, 곧 몸이 딸려가며 상체가 일으켜진다. 앞에 쭈그려 앉은 카이는 잠기운 덜 빠진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정수리로 손을 얹었다. 자고 일어나면 특히 삐죽빼죽 정도가 심한 다이치의 머리를 숨죽여주는 거다. 저가 하겠다며 다이치가 빼는 기색을 해도 어림없다.







"오늘은 우유 사러 들러야 해서 이십 분 일찍 출발이야. 혼자 갈 수 있지?"


"당연해. 니가 이렇게 신경 안 써도,"


"내가 안 깨웠으면 지각하고 말았을 거야."





백 팩을 어깨에 걸치고서 웃는다. 재빨리 얼굴을 안 뺐더라면 이마나 볼에 키스가 날아와도 이상하지 않았을 거다. 도쿄로 대학진학을 하고, 이곳에서 함께 살게 된 이후로 같은 장면이다. 사실 매번 흔들어 깨우는 친절이 아니었다면 이미 출결 관리가 엉망이 되었을지도.




"이따 만나서 마트 가기로 한 거 잊지 마."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며 대강 어어. 하고 답하려는데 결국 이마를 내줬다. 쿵- 하고 이마를 마주 댄 카이가 미소를 짓는 것 같다. 손을 흔들고 현관문 밖으로 사라져 버리니까 비로소 혼자다. 둘이 붙어살기에 조금 좁은 듯한 집. 반은 정돈되어 있고, 반은 어질러진 집안. 대개 카이의 손을 탄 곳은 본래의 깔끔한 모습을 찾곤 한다.





"진짜..."




앉아 주변을 둘러본다. 탁자 위 나란히 놓인 고교 졸업 사진, 대학교 입학 사진. 여전하다.




"꿈이 아니구나."




얼굴을 감싼 다이치. 다시 이불 속으로.





***



 




학교생활이 크게 달라진 건 없다. 훈련은 빼먹지 않고 늘 최선을 다해 임한다. 통학 거리가 좀 더 짧아졌다. 파도 한 자락 없이 안정적일 것만 같은 일상에 유일한 변화라면 사는 집이 바뀌었다는 점. 좀 더 구체적으로는 거기 같이 사는 유일한 파트너가 있다는 것.



모든 걸 동일하게 분담해서 지내기로 했지만, 사실 집안일 같은 경우는 카이의 전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되어 버렸다. 일부러 피하지 않아도 어느새 카이 혼자 모든 일을 완료해 놓는 식이다. 대신 쓰레기 처리는 열심히 도와준다. 받기만 하고 사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니까.



 

"어어? 신발."



 

오늘 싱크대 거름망도 새로 사야 한다고 꼭 말해줘야지. 다짐했는데 초장부터 카운터 펀치를 맞았다. 마트 안 들어서자마자 대뜸 운동화를 가리킨 카이. 볼륨 조절은 조금도 되지 않았기에 장바구니나 카트를 들고 지나던 사람들이 흘끔대며 두 남학생을 쳐다본다. 아침에 잡생각에 젖는 탓으로 정말 지각이 임박했었다. 되는대로 갖춰 입고 집을 나선 건데, 하고 많은 신발 중에 녀석과 맞춘 듯 같은 걸 골라 신고 나왔을 줄이야.




 

"사와무라. 드디어 맞춰 신고 나온 건가."


"네가 신은 줄 몰랐어."

 



지난달 커플 아이템을 원한다며 두 켤레 사 들고 온 카이였지만, 일부러 의도해서 신고 나온 적은 한 번도 없다. 신발은...신발은 너무 티가 많이 난다고.

 



"어쨌든 지금 같은 신발을 신은 게 중요한 거니까. 좋아."

 



무안하지 않았을까. 그런 걱정은 대뜸 날려주겠단 표정이다. 싱긋 웃어 보인 카이는 백 팩을 벗어 카트에 올려두고 앞장선다. 아무렇지 않게 팔목을 잡고 끌었기에 역시 뒤를 따르기로 한다. 몇 걸음 가지 않아 다이치 역시 가방을 똑같은 위치에 얹어두었다.



식재료도 거의 떨어졌고 사야 할 물품도 많다. 남자 녀석 둘이 꾸리는 살림이란 게 늘 구멍투성이가 된다. 가끔 어머니들의 지원이 있다고 해도 턱없이 모자란 수준이지. 한창때 운동하는 중이라 화두는 단연 먹을 것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먹고 싶은 건 얼마든지 말할 수 있지만, 재료 고르기와 조리에 있어서는 카이의 뒤로 한 발 빠지는 게 편하다. 주방 역시 대개는 카이의 영역이었으므로.




 

"배가 좀 든든한 걸 먹고 싶은데. 전골은 어떨까."


"할 줄 알아?"


"생각보다 쉽다고. 안 해 봐서 어렵게 느껴지는 거야."

 



앞에 종류별로 놓인 버섯 중 한 팩을 골라 담는다. 이런저런 채소가 카트를 조금씩 채우고 마지막으로 곤약도 찾았다. 어느새 넘겨받은 카트를 열심히 밀고 옮기는 게 오늘의 임무 같다. 마무리로 거름망 이야기도 빼놓지 않고 전달했다. 거름망 소리를 듣자 손가락을 튕기며 감탄한 카이를 보고, 사실 뿌듯했던 건 비밀로 해두자. 층을 옮겨 식품 파트를 벗어나는데 자꾸 눈길이 따라붙는다. 옷이나 얼굴에 뭐가 묻었나 싶어 몸 이곳저곳을 살피면, 카이는 혼자 느슨히 웃고 딴청을 피우는 거였다.


 

"너 좋아하는 간장 라면도 해 먹자."

 


뜬금없는 소리나 하면서 다시 사람 손을 끌고 걷는다. 카트가 묵직해졌으니 속도가 덜할 텐데도 멈추지 않았다. 주방용품 파트에서 재빨리 쇼핑 목록을 채우고 나서, 카이는 반 바퀴를 빙 돌아 욕실용품까지 왔다. 더 살 게 있었던가? 머리로 가늠하면서 뒤따랐는데 의외의 곳에서 발걸음이 멈춘다.

 



"아무래도 검은색 바탕이 깔끔하지."


"이거?"


"포인트로 빨간색이 들어간 것도 있어. 또..."


"두 개, 사는 거야?"


"응. 너랑 나."

 




욕실에 양치할 때 쓰는 컵은 이미 있는데. 어째서? 라지만 카이는 꼭 같은 디자인의 용품을 망설임 없이 골라낸다. 컵에 이어서 칫솔까지. 게다가 칫솔은 판촉 사원이 앞에서 열과 성을 다해 멘트를 읊고 있기에 부담스럽다. 여태 잘만 끌고 오던 카트를 앞세워, 다이치는 속도를 급격히 늦춘다. 딴청 피우며 물러나고 싶은데. 물론 그러지는 못했다.


칫솔과 치약 세트. 할인 판매. 커플 아이템…. 모르겠다. 눈두덩에 연한 빛 펄을 얹은 여성이 친절하게 안내 멘트를 하는데 왜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건지. 뒤로 붙어선 다이치가 슬쩍 소매를 잡고 당겼지만, 카이는 다시 팔을 끌어낸다. 꼭 손을 마주 잡는 것처럼 되어버렸잖아.



 

"그럼 이렇게 두 개를 살게요."



 

정확히 색깔까지 짚어낸 카이가 기어코 그걸 카트에 담았다. 흣,흠. 헛기침한 다이치는 상냥하게 인사하는 누나의 눈은 쳐다보지도 못하고 걸음을 재촉한다.   





"꼭 사야 하는 건가."


"칫솔은 소모품이라고."


"그건 알지만..."


"사와무라랑 같은 아이템을 쓴다는 게 더 중요하지."




 

어깨를 은근히 부딪치며 말하는 녀석. 너무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저절로 주변을 살펴보게 된다. 다들 무관심한 와중 혼자서만 밭 끝이 간질간질했다가, 몸으로 열이 올랐다가 그랬다. 결국 마트를 돌면서 주방에 놓은 머그잔 한 쌍까지 카트에 담아버렸다. 그게 계산대를 거쳐 봉투에 담길 때 다이치는 계속 딴청을 피우느라 애를 썼다. 카이 덕분에 고심해서 장 보는 수고를 덜었으니, 평소라면 짐이라도 들겠으마 앞장섰을 건데. 다이치는 식재료를 비롯한 '커플 아이템'들이 계산원의 손을 거치는 동안 그 앞에서 얼쩡대기만 하다가, 마트 입구에 다다라서야 얼른 봉투를 받아들어 간다.



잠자코 짐을 넘긴 카이가 곧 보폭을 맞춰 옆을 차지한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 난감하다. 키가 비슷하니까 사실 한 번 시선이 엮이면....피하기가 힘들다.




 

"예전부터 이렇게 해보고 싶었거든."


 

그냥 모른 척 넘어가면 좋겠는데, 또 녀석은 그래 주질 않는다. 너무 곧아서 문제라고. 차라리 무심하기라도 하든가.



 

"혹시 사와무라, 이런 게 불편해?"


"아니야!"



 

버스로 두 정거장 거리라 자연스레 정류장을 향해 걷던 길. 대뜸 열차게 대답해 버린 바람에 지나가던 중년 부인이 두 청년을 빤히 쳐다보고 지났다. 괜히 등허리에 땀이 나는 것 같아서 눈동자 대신 녀석의 가지런한 앞머리 라인과 이마 즈음을 쳐다본다.

 



"그냥, 그냥 익숙하지 않으니까."


"알 것 같아. 우리 처음 한 집에서 시작할 때도 그랬지."


"시작....."


"내가 앞으로,"

 



여태 두 손 가득 나 홀로 짐을 들고 왔구나. 문득 멈춰 선 카이가 양 손목을 잡아낼 때야 깨달은 사실이다. 한 손에 들려있던 봉투를 가져간 녀석이 스르르 웃어버려서 말문이 막힌다.

시작. 시작이라니 너무 간지러운 표현이 아닌가. 아니지, 꼭 그렇게 앞서 나가 생각할 필요는,

 



"익숙하게 만들고 싶어. 뭐든."


"...유키."


"응. 사와무라?"


"걸어서 가자. 집에."


"어어?"




 

이대로 버스 탔다간 얼굴에 열이 안 가라앉을 것 같다. 혼자 짐꾼을 자처해도 좋으니, 지금은 일단 저녁노을에 얼굴빛을 감추기로 한다. 다이치가 퍽 의욕적으로 앞서 걷기 시작했다.





* * * 






전골은 간이 약간 싱거웠지만 둘 다 별다른 말없이 식사를 마쳤다. 짠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카이의 담백한 음식 취향이 고스란히 반영된 덕이다. 주방에서 요리가 이어지는 동안 다이치는 욕실용품을 제 자리에 비치했고, 그리고 사실 커플 칫솔은 어딘가 낯간지러워서 포장도 뜯지 않고 찬장에 일단 넣어두었다.



 

"안 마실 건가?"


"응."


"한 캔 정도는-"


"배불러서야. 다른 이유는 아니고."



 

식사를 마치고 났을 땐 이미 유리창이 거뭇거뭇한 어둠에 물들었다. 창문을 활짝 열어두면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기에 선풍기라던가 하는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된다. 


창가 가까이 붙어 앉은 카이가 두 번째 맥주 캔을 땄다. 몽글대는 거품이 위로 잠시 솟는다. 주욱 입술 끝으로 들이마신 녀석 곁으로 다가가 앉고서도 어쩐지 인중 즈음이 간질간질하다. 먼저 아는 체를 해야 할까 고민 중인데, 역시 타고난 윙 스파이커란 말이다. 방심한 사이에 훅 치고 들어와 버리니까.

 



"사와무라. 칫솔 봤어?"


"……."


"어차피 교체할 때가 됐으니까. 당장 오늘부터 개시하자는 뜻에서."

 



마주칠 캔이 없으니, 카이는 무릎 위 자리한 다이치의 주먹으로 둥그런 캔을 슬쩍 터치한다. 식사 준비하고 짧은 사이에 칫솔을 꺼내 놓은 카이였다. 정말 나란히, 원래 한 쌍이었다는 듯 컵에 꽂혀있던 칫솔이 세면대에서 손 씻는 내내 왜 이리도 시선을 사로잡던지. 그냥 무심히 웃어주고 말 일인데 자꾸 눈을 피하게 된다. 고백한 순간부터 그랬다. 진지한 동시에 감추는 것은 없고, 마음속에 키워둔 씨앗을 곧잘 움 틔워 입술 끝으로 피운다. 카이의 표현이 직구로 꽂혀 들어올 때마다 가슴 언저리가 출렁대며 요동치기 일쑤였다.



어영부영 고개를 끄덕이고만 다이치가 무릎을 풀어 앉은 다리를 한다. 반바지 밑단으로 이어진 허벅지에 왠지 닭살이 오소소 돋는 것만 같다. 다시 맥주를 들이켜던 녀석이 불쑥, 시야로 들어오지만 않았다면 발목이 와르르 떨릴 일도 없었으리라.




"사와무라!"


"...깜짝이야. 굳이 그렇게 부르지 않아도,"


"궁금한 게 있어."


"그래, 그래. 알았어. 조금만 뒤로 가서."


"아침에 꿈. 얘기해 줄 수 있나?"



 

눈앞을 흠씬 채워버렸으니 제대로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맨 허벅지 위에 손이 얹혔다는 것도 처음엔 몰랐다. 읏차챠-! 맥주캔의 냉기가 대뜸 살갗을 두드리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발차기하듯 움직여버린다. 덕분에 맥주 일부가 두 사람에게 방울방울 튀었다. 머리카락 곳곳 거품이 묻은 걸 알고 투박하게 털어내기 시작했다. 뒤로 물러나나 싶은 카이가 소리 내어 웃고 있다.



 

"차갑잖아."


"긴장한 건 아니고?"


"...놀랐다고. 그렇게 갑자기,"


"갑자기 물어봐야 사와무라가 다른 변명거리 생각할 시간이 없으니까."


"내가 왜."


"아침에 제대로 얘기해 주지 않았잖아."

 



빙긋, 입꼬리 올려 웃는 녀석은 기어코 맥주캔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알고 있었나? 나름 자연스럽게 넘어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잠기운에 완전히 취해있던 중이라 확신하긴 이르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기억을 더듬고, 앞으로의 일을 점쳐 보려는데 정말로 틈을 주지 않을 생각인가 보다. 양손이 자유로워진 카이가, 궁금증에 취한 녀석이 앞으로 다시 성큼 다가왔다.


하나, 둘. 매끈한 무릎이 닿는다. 다름 아닌 제 허벅지로 얹혀드는 무게와 질감에 다이치의 입술 사이가 조금씩 벌어졌다. 어. 어어....? 희미한 소리가 새어나올 때마다 누군가의 입꼬리는 그만큼 올려 들었고. 결코 가벼운 무게가 아닌지라 나중엔 낮게 끓는 신음이 나올 참이다. 아프다고 말하려는 순간 알싸한 맥주 내음이 코끝을 확 덮친다.




 

"궁금해."


"뭐...뭐...,"


"음. 그냥 모든 게?"


"……."


"나는 사와무라의 작고 사소한 것들까지 다 궁금하다고."




 

목덜미로 팔을 덥석 감싸 안은 카이. 얼굴 앞으로 흰색 무지 티셔츠가 한가득이다. 너무 당황해서는 멍하니 위를 올려다본 다이치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몸싸움은커녕 작은 충돌조차 없이, 너무나 쉽게 뒤로 눕혀진다. 체중을 약간 실어 기댄 녀석 탓이라고 생각하자. 맨바닥에 철퍼덕 누워 버리게 된 다이치로서는 그렇게 생각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천장에 달린 형광등과 카이의 그림자가 한 덩어리가 된 순간이다.



허리에 올라앉은 녀석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빛을 등진 탓에 보이지 않는다고 믿는다. 작게 숨을 골랐다. 성인이 되고 한 지붕 아래 삶을 공유하지만, 사실 합숙 생활에서 인원이 드라마틱하게 줄어든 정도였지…. 가벼운 스킨쉽 외에 이렇다 할 사건은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갑자기 밀착해 버리면.

 



"허락해 줘. 앞으로도 그럴 수 있게."


 


말이, 안 나와 버린다고.

 



"설마 지금 숨 참고 있는 거야?"


"아니, 아니..야."


"네 심장 소리 다 들린다."



 

갑자기 가슴 위로 손이 턱, 얹혔다. 그거 때문에 그나마 잡혀있던 박동도 다 망가지게 생긴 건 알고 있는 건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들어온 녀석이 코끝을 마주 대어버렸다. 숨을 쉴 수가 없다. 방금 양치하고 나오지 않았으면 정말로 기절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커허..헉...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홀로 고문 체험 중인데, 카이의 손바닥이 위로 얹혔다. 곧 조심스레 깍지를 끼고 시선을 맞추려 애를 쓰는 것 같다. 그럴듯한 말 하나 건네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애절하게 다가오는 건지. 마주친 눈에서 숨을 뗄 수가 없다. 혹시라도 입술이 닿으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아주 아주 조심스럽게 달싹이게 되었다.



 

"그래, 꿈...꿨어."


"내가 나왔어?"


"응."


"좀 더 자세히 얘기해줘."


"꿈에..그, 옛날에..."


"듣고 있어."



 

아무래도 카이는 웃고 있는 게 틀림없다. 입바람이 아랫입술을 자꾸만 건드리나 싶더니, 결국 녀석이 중얼댈 때마다 촉촉 대며 입술이 맞붙는 거였다. 등허리로 소름이 돋는 바람에 잠시 말소리가 멈춘다. 당황스럽지만 싫지 않고, 그래서 몸으로 열이 난다. 볼을 감싸 쥔 녀석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눈치다. 처음부터 그랬겠지. 아침부터, 아니. 고백하던 그 날 밤부터 이미.

 



"우리. 졸업시즌 때...."


"응."


"유키 너, 나한테...그...ㄱ...백..."


"그래. 알고 있었어."




 

내가 널 좋아하게 될 거란 걸. 그것도 아주 많이.

 



"사실, 다 알고 있었어."

 



호흡 사이로 흐른다. 입술이 더 깊게 닿는다.

해보자. 해보기로 한다.




 

"...다이치."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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