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랑야방 배포전에 발매될 책의 웹공개분입니다.

   엠프렉 요소 有





춘春
계季
귀歸
소巢






여며낸 옷자락 사이, 경염의 손길은 느리고 세심하게 움직인다. 아직 젖은 기색 역력한 비부를 내보이기엔 심히 부끄러우니 보이지 않는 곳을 손으로 덧그리며 정돈하는 것이다.



몰아친 정사 이후 완전 맥이 빠져버린 매장소였다. 그는 경염의 앉은 다리 위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서 숨을 고른다. 가볍지 않은 몸으로 움직이거나 매무시 고치는 게 쉽지 않은 탓에, 어쩔 수 없이 경염의 손을 빌리는 중이리라.





"스치기만 해도 아픕니다."


"정말입니까?"


"으음....그냥 두세요."




목깃 즈음을 고쳐 만지던 차, 가슴께로 스치는 작은 기척에도 온몸이 긴장할 정도였다. 잠자리 열기가 잦아들고 나서야 부어오른 가슴 주변이 눈에 들어온다. 경염은 못내 멋쩍은 듯 헛기침을 두어 번 해댔다. 그리고선 퍽 애연한 눈빛으로 매장소의 몸 곳곳을 빼놓지 않고 어루만지니, 이것은 매장소의 배가 불러올 때마다 그 정도를 더했다.



처음 책사로서 그를 들였고, 후일 깨달았을 때엔 이미 깊은 연심이 자라버린 뒤였다. 부친을 여의고 홀로 상단을 이끌어 가던 경염에게 그는 스스럼없이 만사를 논할 수 있는 지기이자 스승이며, 때로는 격렬한 언쟁도 불사하는 훌륭한 논적論敵이기도 했다. 그 무엇보다, 위하고 귀히 여기는 마음 가눌 길 없는 배필이 아니던가. 유일한 걱정이라면 매장소의 허약한 몸 상태일 것이다. 두 사람 사이 내려진 복중 태아는 의심할 여지 없는 축복이겠으나, 혹여 잔약한 몸에 무리가 될까 봐 심경이 복잡해지곤 하였다.





"어찌 그리 보십니까."


"배가 이렇게 불렀는데, 나는 또 집을 비워야 하는군."


"또 그 말씀이시군요."


"마음이 편치 않소."


"그러신 분이 매번 저를 이리도 힘들게 하신단 말입니까?"





축 늘어져 있던 몸 겨우내 일으킨다. 매장소가 배를 쓰다듬으며 핀잔을 주자, 그제야 경염의 낯에도 희미하게나마 미소가 걸리었다. 상단 대방의 자리 결코 허식이 아닌 터라. 경염은 해가 거듭될수록 무겁게 지워지는 소임을 다하려 바쁜 나날을 살아가고 있다. 멀고먼 타지를 오가며 활로를 개척하고 상단의 위세를 드높이는 일이 크나큰 공적이 되었으나, 한편으론 귀애하는 이에게 소홀해지는 것이 아닐까 싶어 고심하는 것이다.



매장소는 스스로 옷깃을 여민 뒤 그에게 다가갔다. 경염의 손을 잡고 가만히 제 얼굴에 대어보는 중이다. 조금 부은 듯한 눈두덩을 내려트리며 웃자, 경염이 그를 따라 웃는다. 많은 말 오가지 않아도 교감으로써 소통하니 부창부수夫唱婦隨의 본이 되리라.





"맹계협은 지대가 척박하고 유흥을 도통 멀리한다 하니, 제가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요."


"걱정?"


"대방께서 타지의 미색에 빠지실 일이 줄어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왜 그런 실없는 소리를 하는 겁니까."


"*침어낙안沈魚落雁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니지요."


"선수를 빼앗겼군."




침어낙안沈魚落雁

미인을 보고 물고기는 연못 속에 잠기고 기러기는 하늘로부터 떨어진다는 뜻. 침어沈魚는 월나라 서시, 낙안落雁은 한나라 왕소군의 고사에서 유래한다.



두 사람은 애정 어린 말싸움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도 낯 한 번 찡그리는 일이 없었다. 매장소의 긴 머리칼을 손으로 빗고, 새 자리에 눕혀주었다. 그 곁에 모로 누워 자리를 지키려니 도통 안심이 되질 않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렇게 치면 위험한 이는 따로 있지 않겠소?"


"저 말입니까."


"금릉 땅에 담장 밖만 넘겨 보아도 젊고 아름다운 이들이 넘쳐나는데, 나는 무엇을 믿고 자리를 비우란 말이오."


"이 배를 보고도 제게 수작 걸 이가 있단 말입니까?"




복부와 허리를 감싼다. 경염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힘주어 안아오자, 숨소리가 조금씩 느리게 가라앉았다. 분위기에 휩쓸린 농인 듯, 경염은 끝내 진심어린 청을 침소 깊숙이 남길 요량이다. 




"아무에게나 곁을 내주지 마시오. 특히 사내에게."















⚜ 








이틀 연달아 내리던 폭설이 멈추어 잠잠하다. 모처럼 맑게 갠 하늘 아래 설원은 위세를 떨치고, 얼어붙은 수목樹木위로 설백색 옷이 덧씌워졌다. 추위에 얼어붙은 눈 여전하니 바깥 땅 밟는 것에 신중하여야 한다. 그러나 조식을 마친 뒤, 매장소는 정원까지 걸어 나와 가벼운 산책을 시작한 후였다. 그 곁에서 한 시도 떨어지지 않는 려강은 혹시 안 채의 정 부인에게 소식이 들어갈까 노심초사하는 기색이다.   



"도방. 이리 밖에 나오신 걸 아신다면 반기지 않으실 겁니다."


"어머님께는 내가 잘 말씀드리지."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대방께 전서구라도 날릴 참인가?"


"제 말뜻은 그런 게 아니라...."




얕은 돌계단을 밟아 내리자, 얼른 옆에서 부축하는 려강이다. 경염이 맹계협으로 떠난 지 이제 고작 사흘째였다. 출발한 다음 날부터 눈이 몰아친 탓에 본가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되, 그저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에 기대어 보낸 사흘간의 시간이라. 매장소는 정작 제 몸 걱정하는 려강의 마음 헤아리지 못한 것만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 참이다. 달래듯 그의 어깨를 두드린 뒤 평지로 걸음을 내디뎠다. 소복이 쌓인 눈 위로 처마에서 떨어진 낙수落水의 흔적이나 잡다한 날짐승의 발자국 따위가 보인다.



두 사람이 좀 더 복판으로 나아가 나무 그늘로 멈추었다. 나뭇가지 위 얹혔던 눈 알갱이와 꽃잎이 흩날린다. 매장소는 담장에 반쯤 베여 들어오는 햇빛 덕에 눈을 슬며시 찡그리고도, 눈 덮인 매화나무를 살피었다.  




"이 *한위寒威에도 지지 않다니, 얼마나 올곧고 당찬 기상인가."


"도방과 꼭 닮은 나무가 아닙니까."


"찬讚이 지나치네."


"아닙니다. 제가 도방을 모신 게 몇 년인데 그 정도 확신이 없다 하겠습니까."


"……."


"곧 봄이 되고 아기씨께서 태어나시면, 이 녀석들도 더욱 만개하겠지요."



한위寒威

몹시 심한 추위. 또는 그 기세.



나무 기둥에 손 얹은 두 사람 잠시간 담소를 나누었다. 려강은 두 부부 만큼이나 복중 태아에 큰 관심을 쏟고 있었고, 이것은 오랜 세월 그의 곁을 지키며 놓을 수 없게 된 신의와 충성이라 봐도 무방했다. 추위에 금세 얼어붙는 손끝이 안쓰러웠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려강이 안으로 들기를 청하니, 결국 발길을 돌리려던 참이었다.




"려강. 방금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았나?"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저는 듣지 못했는데요."


"아니야. 분명 담벼락 아래...."




넓게 늘어진 소매를 정돈하여 걸음을 옮긴다. 배 위에 손을 얹은 매장소가 조심스레 눈길 위를 헤쳐 가니, 려강 역시 조금도 놓치지 않고 그 뒤를 지켰다. 나무 그림자 밑, 담장 귀퉁이로 둥그렇게 흙바닥이 보였다. 유일하게 눈 쌓이지 않은 곳 울음소리가 작지만 분명하게 들려온다. 손바닥 크기의 털 뭉치인가 싶던 것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이건 살아있는 짐승이 아닌가."


"도방. 만지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이것 좀 보게. 얼마나 추위에 떨었으면."


"……."




매장소의 말대로, 그것은 갸릉대며 눈밭을 기어 다니는 짐승의 형상이었다. 등 털이 특히 흰푸른 색에 전체적으로 은백색 털을 갖추어 설원 한가운데 둔다면 육안으로 구별해내기 힘들 것이다. 어디서 온 지도 모를 들짐승을 손수 다루다니, 려강이 그를 말리려 하였으나 이미 늦었다. 매장소는 둔한 몸짓으로 겨우내 무릎을 굽히고 그 작은 짐승을 손안에 들인 후였다.


정체불명의 짐승은 울음이 날카롭고 거칠다. 급작스레 닿은 온기에도 놀라는 기색 없어, 도리어 살기 위해 몸부림치듯 그 손바닥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제 보니 오른쪽 앞발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어디선가 골절상을 입거나 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작고 어린 짐승이 어찌 혼자 헤맨단 말인가."


"무슨 병을 옮길지 모릅니다. 정 치료해야겠다면 제가 할 테니,"


"려강. 이 녀석 눈을 좀 보게. 이렇게 푸르고 맑은 눈빛을 본 적이 있나?"


"도방...부디."


"그래. 너는 어디서 왔느냐. 어미가 버리고 간 것이냐?"




나오는 건 그저 한숨뿐이라. 이미 매장소의 귀에 제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 것이라 짐작했는지, 려강은 그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말 못하는 짐승에게 다정스레 속삭이며 품어 안는다. 캬윽-흥─으응- 구슬픈 울음소리가 옷깃을 물들였다. 매장소는 꽁꽁 얼어 눈 조각 붙은 발을 털어주고 입가에 손가락을 대어본다. 잠시 살 내를 킁킁대던 녀석이 까끌한 혀를 내밀어 살갗을 핥기 시작했다.


이것은 단지 가엾은 미물을 향한 동정과 인仁이던가. 틀렸다. 매장소는 유연하게 움직이는 어린 짐승의 몸선과 유려한 꼬리 놀림, 무엇보다 빨려 들어갈 듯 청아한 눈동자에 매료된 것이 틀림없었다. 얼굴을 쓰다듬고 품자, 짐승의 꼬리가 손목을 감아왔다. 그 자태 민첩하고도 물 흐르는 듯하여, 도무지 품 안에서 놓을 생각이 들지 않는다.




"도방. 어찌 하시려구요."


"내 이 녀석의 이름을 지었네."


"예? 이름이요?"


"비류飞流. 이게 녀석의 이름이야."


"설마, 안으로 들이시려는 겁니까?"


"음."




기우뚱 몸을 일으킨 사내가 녀석을 안아들고 걸어간다. 허어....기가 막힌 려강은 무어라 첨언하려 했지만, 이미 매장소는 안채로 몸을 들인 후였다. 기세 오른 울음이 연신 소택 안을 채운다.








⚜ 



 





"안 의원님 말씀을 못 들으신 겁니까?"


"들었대도."




돋은 송곳니가 손등을 긁는다. 틈새로 보는 눈이라도 있을까, 려강이 얼른 처소 문을 닫아낸다. 지금 당장 나타나는 징후가 없다 하여도 본디 들짐승이란 사람과 융화되어 살 수 없는 법이다. 언제 어떻게 병인病因으로 작용할지 알 수 없단 뜻이었다. 더군다나 홑몸도 아니요, 체력이 약한 매장소에게 나쁜 영향이라도 끼친다면 이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안 의원이 탐탁지 않은 기색으로 고개를 갸우뚱하였으나, 매장소는 끝끝내 고집을 피워 짐승을 내치지 않았다. 도리어 비류란 애칭도 하사하고 줄곧 불러 어여삐 여기니 그 고집 말릴 이가 또 누가 있겠냔 말이다.


어쩌면 이는 모성의 또 다른 모습일까. 회임한 뒤로 세상 만물 작은 것들에도 유독 관심을 쏟는 광경이 잦아졌다. 다친 짐승을 침소로 들여 밤낮으로 품고 대화를 나누는 걸 보고 있자면, 사실 려강으로서는 애잔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경염이 상단 수장의 책무로 공사가 다망하여 긴 밤 홀로 보내는 적 잦았으니 말이다. 오죽 적적했으면 그럴까 싶었지만 단 하나, 용납키 힘든 모습이 연출되곤 한다.




"상처가 나겠습니다!"


"고작 이 작은 이빨로 말인가?"


"도방. 녀석의 버릇만 나빠져 앞으로 말릴 수가 없을 겁니다."


"괜찮네. 이보다는 안 의원이 놓는 침이 더 아파."


"정말 고집이 대단하십니다."


"그러한가....네 생각은 어떠하냐. 비류야. 답을 해보거라."




매장소는 붓까지 놓고 그 답을 들으려 손을 놀린다. 이제 앞 다리의 상처가 거의 회복되어 기운이 왕성해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마치 이곳이 제 영역이라도 되는 듯 기세등등한 들짐승이렷다. 그 모습은 얼핏 백호白虎의 새끼인 것 같으며 청색과 은빛의 털이 묘한 조화를 이루었으니 실로 기묘한 동물임이 확실하다.



카르릉─ 제 딴에는 포효라도 하겠단 것일까. 콧숨을 있는 대로 내며 이를 드러낸다. 너른 소맷자락 안에 파고 들어가 집으로 삼고, 매장소의 하얀 팔목에 발톱 세워 매달리고 송곳니를 갈아대니 골칫거리다. 아직은 미약한 정도라고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날이 다르게 자라나는 짐승에게 살갗을 내어준다는 건 결코 바람직한 일로 볼 수 없다.




"이제 운신하는 데 무리가 없는 듯하니, 곧 방생放生함이 맞겠습니다."


"으응? 이 어린 녀석을 말인가?"


"그럼 계속 품고 사시려 했습니까? 대방께서 과연 허락하시겠느냔 말입니다."


"그거야...."




입술을 모아 움쭈쭈 달래는 시늉하고, 매장소는 눈을 굴리며 생각에 잠긴다. 갸릉대던 놈을 가슴팍 즈음으로 안아 올리고서 이런저런 궁리를 하는 듯했다. 어떻게 해서든 처소에 오래 두고 볼 심산이리라. 저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녀석이 침소를 꿰차고 앉았다니, 같은 사내로서 대방이 허락하실 리 없지. 려강은 확신에 차 있었다.




"내가 대방께 청을 넣어야겠군."


"오히려 역효과만 나겠지요."


"그게 무슨 뜻인가?"


"아닙니다. 제가 말씀 올린들 믿기나 하시겠습니까."


"불퉁하게 굴지 말게."


"도방께서 요 며칠 그 녀석에 심히 빠지신 듯하여, 걱정되니 드리는 말씀일 뿐입니다."


"그래. 잘 알겠네. 내 이 서찰만 완성하고 잠자리에 들 생각이야. 대방께 전할 말이 아주 많거든."




려강은 볼멘소리를 멈추고 더 필요한 것이 있는가 여쭈었다. 화롯불을 보아 달라 부탁한 뒤, 매장소는 무릎 맡에 어린 짐승 놓아두고 다시 붓을 집어 든다. 맹계협에 당도했다는 서찰이 도착했으니 그대로 답신을 완성하려 부지런히 글월을 적던 차였다.





"대방께서 네 이야기를 반겨주시면 좋겠구나."


"……."


"아주 괜찮은 지기를 만난 것 같다고 말이다."




글씨를 적어내리는 손놀림 활기를 더한다. 매장소는 이곳의 안부를 전함과 더불어 우연한 계기로 교유交遊하게 된 벗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지 않았다. 제 이야기를 전한다는 걸 알고나 있을까. 살굿빛 코를 벌름거리던 녀석이 늘어지게 하품을 해댄다. 허벅지 안쪽으로 아장아장 걸어들어, 곧 부른 배 즈음에 얼굴을 부비는 것이었다. 풍성한 꼬리가 복부를 간질인다.



"왜. 너도 또래의 벗이 필요한 것이냐?"



배로 느껴지는 태동이라도 안단 말인가. 은사銀絲처럼 번쩍이는 수염이 배꼽 근처에 어른어른했다. 매장소는 갓난아이를 달래듯 궁둥이를 두들기고 좀 더 몸을 끌어안는다. 그르릉 숨을 몰아낸 녀석이 복부에 기댄 채 엎드렸다. 곧 잠에 빠져들 행색이라. 매장소가 입에 걸린 미소를 지우지 못하였다. 서찰은 결미를 향해간다.







⚜ 



 




백운白雲이 자욱하게 깔려 발밑조차 가늠키 힘들다. 다행히 완만한 땅을 밟아 걸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풀 내음과 새소리가 끼쳐오기 시작했다. 경염은 머리 위 늘어진 나뭇가지를 조심스레 걷어내고 좀 더 전진한다. 그 기척에 놀랐는지 작은 새 두어 마리가 푸드득 위로 날아올랐다.


매화목 그늘로 늘어선 담장, 불 밝힌 연화석등蓮花石燈. 익숙한 정경이다. 이곳은....이곳은 소택에 딸린 정원이 아닌가.



"어찌하여 이곳에."



혼잣말 중얼대던 입술이 닫히었다. 구름이 걷히고 어른대는 인영 탓이다. 눈앞의 사내는 흐트러진 머리를 귀 뒤로 넘겨 정돈하더니, 품에 안고 있는 작은 물체를 향해 얼르는 소리를 내었다. 그의 하얀 의복과 빛깔이 꼭 어우러지는 몸체이다. 털이 북슬하게 돋아있고, 여기서도 가늠될 만큼 새빨간 혀를 지녔다. 짐승이 작게나마 울음을 내자 정성을 쏟아 다독이기에 여념 없었다.




"...매장소?"


"품에 안고 있는 게 무엇입니까."




몇 걸음 가지 않아 그 정체를 가늠한다. 낮게 울리는 콧노래와 얼굴 윤곽만으로도 그가 매장소라는 걸 짐작할 수 있으리라. 물음에도 답하지 않고 시선이 고정된 것으로 보아, 경염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듯했다. 낯선 풍경에 놀란 것도 잠시. 경염이 그들의 바로 앞까지 다가가려 했으나, 이 또한 여의치 않다. 급작스레 몰아치는 폭풍설暴风雪이 사이를 막은 것이다.


중심을 잃지 않으려 얼른 나무기둥을 붙잡는다. 흙과 나뭇잎 따위가 세차게 날리는 바람에 시야가 흐릿하게 번졌다. 그들은 바로 코앞에서 벌어지는 일은 애초 모르는 듯 단란한 한 때를 보내는 듯하다. 퍼런 눈의 짐승이 큰 소리로 목울음을 내니, 소택 전체가 울리고도 남았다. 경염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뚫어져라 그 작태를 살핀다. 매장소는 옷깃에 갈고리처럼 걸려 매달린 발톱도 개의치 않고 녀석을 어르는 데 정신이 없었다. 가슴팍에 정수리를 마구 문대던 짐승이 조금씩, 조금씩 몸을 불린다.



"매,장...소! 위험하오! 어서,"



한쪽 팔에 안겨있던 몸체는 곧 그 품을 넘어서고, 나중엔 집채만 한 크기가 되어 매장소의 품을 뛰쳐나왔다. 은백색 털에 군데군데 흑갈빛 무늬가 자리하니 틀림없는 백호의 형상이다. 놈이 몸을 털자 쭈볏 선 터럭이 번쩍여 서슬과 같았다. 입을 크게 벌린 놈이 작심이라도 한다면, 매장소를 삼켜버리는 건 일도 아닐 듯했다. 사력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려 고군분투하던 차. 꼬리를 좌우로 흔들어댄 범이 매장소를 제 등 위로 태워낸다.



"어딜 가겠단 것이오. 매장소! 매장소!"



더없이 기쁜 낯빛으로, 매장소는 짐승의 등털에 올라앉아 목덜미를 꽉 붙든다. 앞발을 구르며 포효한 짐승이 훌쩍 담장을 뛰어넘었다. 얼굴을 때려오는 눈발도 막지 못하여, 경염은 맹렬하게 그 뒤를 쫓으려 했다. 음성이 너울너울 퍼져 설원을 적신다.



 

.

.

.

 


 

"어딜...가겠단 것이오. 매장..소.."



허공에 뻗어진 두 손, 머지않아 침상으로 가라앉았다. 혼미한 와중 불빛 가려오는 기척에 놀라 눈을 떴다. 군장 차림 그대로인 호위 열전영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여길 바라보고 있다. 경염은 상체를 벌떡 일으켜 주변을 살핀다. 소택의 익숙한 침소도, 정원도 찾아볼 수 없다. 오른쪽 벽에 걸린 흑표黑豹 가죽을 보고 나서야 이곳이 맹계협이란 것을 상기시킨다.



"대방. 악몽을 꾸신 겁니까?"


"아니다. 그저...."


"어떤 이유인지, 계속 도방을 부르셨습니다."


"그랬던가."



열전영은 침소에 큰 변고가 없음을 깨닫고 한시름 놓은 듯했다. 그대로 목 축일 물을 따라 건네니 뒤늦게 그것을 받아든다. 경염은 마치 눈앞에 벌어진 일처럼 생생한 꿈을 더듬느라 혼이 나간 것만 같았다.



정체 모를 맹수와 매장소. 소택 정원을 차지한 미지의 짐승은 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예로부터 흰털을 지닌 동물은 상서롭다 하여 길조吉兆로 여겨왔다. 헌데 그 커다란 범이 매장소를 태우고 사라지려 했다….






"열전영. 본가에서 소식은 아직 없는가."


"예. 아직 서찰은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도방께서 안부 잊으실 리 없으니 곧 닿겠지요."


"……."


"어인 일이십니까. 꿈에 안 좋은 장면이라도 보셨는지요."


"아니. 단지 흔치 않은 짐승이 나왔을 뿐이다."


"짐승 말입니까? 도방님과 함께요?"


"음."




가라앉은 어조로 꿈에 관해 설명하자 그 역시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하였다. 복중의 태아 들어서기 전 그 흔한 태몽조차 꾸지 못하였으니, 이제 와 깃든 태몽으로 보아야 할지. 그렇지 않다면 매장소의 신변에 무슨 문제가 생기기라도 한 것일지. 경염은 복잡한 심사에 좀처럼 자리로 눕지 못하는 중이었다. 그저 스쳐 지날 꿈이라기엔 심히 생생하고 묘하지 않은가.


곁을 지키던 열전영이 가까이 다가드니, 경염을 안심시키려 부단한 노력을 하는 것이리라.




"대방께서 이곳에 머문 지 닷새째가 되었습니다. 맹계협의 사나운 짐승과 호방한 인사들을 매일같이 대하시니, 그런 꿈을 꾸는 게 이상할 일도 아닙니다."


"그런가."


"예. 더군다나 몽중의 맹수가 도방을 해한 것도 아니니, 필시 길조라 생각됩니다."


"고맙다. 네 말을 들으니 한결 마음이 놓이는구나."


"비견으로나마 대방께 위로가 된다니 다행입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경염은 비로소 침구로 몸을 뉘인다.

이튿날 도착한 서찰 역시 본가의 화평만을 고스란히 전하였으니, 경염의 걱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중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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