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평景平 2년, 금릉. 





황상의 발걸음이 소향궁苏香宮 문턱을 넘어선다. 뒤따르던 태감 총관 고담은 이미 연로하여 그 보폭을 따르는 데 힘에 부쳤으나, 이 또한 무를 수 없는 책무이니 속도를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아직도 눈이 녹지 않아 육궁 전체가 하나의 설국雪國이나 다름이 없는데, 소향궁 뜨락에 핀 매화는 유구한 기색으로 황상의 행렬을 맞는다. 붉디붉은 매화 위 쌓였던 눈은 옷자락이 일으키는 바람에 조금씩 부서져 내렸다.





"상태는 어떠하더냐."


"심신이 쇠衰한 상태이긴 하오나, 다른 병증은 없다 하였습니다."


"소향궁 시비와 궁인들에게 함구령을 내려라. 또한 일대 경비를 강화하도록 하시오."


"예. 명을 받듭니다."




경염은 눈밭에 찍혀있는 어지러운 발자국과 끌린 자국 따위를 빠짐없이 살피며 명을 내렸다. 중간중간 넓게 뭉개어진 흔적은 무릎을 꿇은 채 네 발로 설원을 기어 다녔을 당시 상황을 짐작도록 했다. 그는 눈가루가 점점이 흩어진 층계를 노려보더니, 곧장 발길을 옮긴다. 혹여 옷자락을 밟기라도 할까 노심초사하여 뒤따르는 고담은 개의치 않고 내실로 몸을 들이기 위해 서두르는 기색이었다. 


태자 소경염. 다방면에서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고, 장장 5년 간의 전쟁을 겪은 뒤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연호年號를 경평景平이라 칭하고 국정을 운영한 지 두 해를 넘겨간다.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국력을 다진 젊은 황제를 너도나도 칭송하며 따르니 태평성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 단지 그의 유일한 치부라면 육궁 가장 내밀한 곳에 자리한 아담한 처소였다. 



그 어떤 품계도 오르지 못한 자가 육궁 내에 기거한다. 여인도 아니며, 엄연한 사내이다. 후궁에 들지 못한 이가 육궁에 드는 것은 황궁 법도에 어긋나니 그 반대가 격렬하였다. 정히 들이시려거든 품계를 내려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으나, 황상께서 이마저도 끝내 허락지 않고 강행한 일이었다.





"어찌 이리 군단 말인가! 어째서."


"폐하. 아직 듣는 귀가 있사옵니다. 고정하십시오."


"참으로 매정한 이가 아닌가. 이것은 참으로...."




빈嬪의 품계라도 받아들였다면 이보다 나았을까. 당사자가 아뢰길, 책사도 신하도 아니요 후궁된 몸으로 취하려 하신다면, 차마 연명할 수 없는 욕이 될 것이라 했다. 자결을 해서라도 씻고 싶은 수치라 고백하는 모습 결연하기 그지없어, 경염은 두려움에 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야말로 무품無品의 남총男寵이 황제의 궁에 살고 있다. 없는 듯 숨죽여 살고 있음에도 평안한 날이란 찾아보기 힘들다.



입궁한 후에도 오늘과 같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척에 두고 품어 지낸다면 아무 걱정이 없을 것이라 여겼건만, 야속한 이는 결코 뜻대로 살아주지 않을 참일런가. 몸이 쇠약한 것은 둘째로 치고 제대로 앞도 볼 수 없는 채로, 어찌하여 이런 일들을 벌인단 말인가.





"황제 폐하 납ㅅ..."


"됐다. 다들 물리거라."


"예. 폐하."





발작 증세가 가라앉으면 한동안 끔찍한 악몽에 시달린다. 소향궁의 매비가 봉두난발 한 채 눈밭을 기어 다녔단 낭설이 가끔 황궁의 입소문을 탔다. 매비梅妃. 그것은 황상의 총애를 받는 이를 향한 조롱 어린 비칭卑稱에 가까웠다. 제발 출궁시켜 달라 울며 애원하던 자가 기진하여 다시 처소 안으로 업혀 들어갔으니, 전갈을 받은 황상이 한달음에 이곳까지 달려온 것도 역시 익숙한 일이다. 



내실에 들자마자, 경염은 지체 없이 침상으로 향했다. 금침 위에 움츠려 있던 사내가 기척을 듣더니 더욱 낯빛이 질려버린다. 궁인들 여럿이 달라붙어 의관을 정제했을 테니, 머리는 단정하게 빗어 올린 모습이었다. 단지 그 아래 깃든 눈매와 입술은 오래도록 추위에 떨던 이처럼 파리하고, 손끝 하나라도 타인에게 내어주기 싫어 기를 쓰는 것 같았다. 





"내가 왔소."


"매장소. 내 말 들리시오? 눈이 쌓였으니 밖에 함부로 나가지 말라 그리 일렀거늘,"


"..아,버지는...언제...오시는,겁...니까...아직..지원군이..."




대유국과 벌인 전쟁에 참전했던 매장소는,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으나 몸 상태가 극도로 쇠약해져 한동안 자리보전을 해야 했다. 경염은 그가 살아 돌아왔음에 감복하여 그것만으로도 하늘을 우러러 허리를 숙일 참이었다. 그러나 비극의 그림자는 좀처럼 두 사람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정왕 소경염이 황위에 올라서도 그 신뢰 바래지 않을 것임을 두려워했을까. 즉위 반 년 전, 소택苏宅에 일어났던 의문의 화재사건으로 큰 희생을 치러야했다. 이미 전장에서 절반의 수하를 잃었던 매장소는, 소택이 전소된 불길로 인해 동료와 수하를 거의 다 떠나 보내야 했다. 불길 속에서 거동조차 힘들던 그를 살리기 위해 다들 기꺼이 목숨을 내던졌으니 당연한 이치가 아닐런가.


화재 이후 눈까지 멀어버린 매장소가 기댈 곳이란 실상 많지 않았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려 한 적도 있으나, 그럴 때마다 눈물로써 호소한 경염이라. 죽음마저 놓아버린 이후, 매장소는 진주를 뱉어낸 모패母貝처럼 살아왔다. 곧 스러질 것 같은 몸뚱이라도 경염은 그것만으로 족하리라 마음먹었다. 곁에만, 이 곁에만 있어준다면. 

 




"……."


"지원..군이 올,겁니다...이대로는...절대.."


"정신 차리시오!"


"저를 보내...ㅈ..나를, 날 보내주십시오! 허,윽..으...."


"임수!"





누가 목을 조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눈을 까뒤집는다. 허우적대며 자꾸 도망하려는 몸을 강제로 안아들고 당겼다. 경염은 참담한 음색으로도 그 이름을 부른다. 귓가로 입술을 옮기고 연신 속삭였다. 임수. 내가 여기 있다. 임수, 적염군은 모두 무사하다. 모두….


어깨를 꽉 쥐어낸 매장소였다. 그는 계속해서 드리우는 음성에 집중한 듯 몸을 잘게 떨면서도 입을 다물어 버렸다. 대신 초점 없는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황상께서 백의白衣의 사내를 꼭 붙들어 안고 아이 얼르듯 몸을 다독인다. 그 역시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았으나, 이를 악물고 참는 듯 보였다. 차가운 얼굴을 쓰다듬고 목덜미를 어루만진다. 타인의 손길을 느끼자 여태 얌전하던 매장소가 버둥대며 낮은 비명을 토했다.


차마 만지지도, 품지 못했던 시간이 반평생을 넘겼다. 경염은 옥좌에 오른 뒤 실명해버린 그를 궁에 들여 취했다. 듣고 나누었던 음색과 몸짓이 셀 수 없을 것인데, 눈이 멀었다고 그 상대를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매장소는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 기를 썼다.




"아...냐, 절대...아ㄴ.."




적진을 누비며 찬란하게 빛나던 소년무장. 임섭의 아들, 임수林殊. 

침상 아래로 굴러떨어진 몸이 목석처럼 뻣뻣하다. 매장소는 두 팔과 다리로 힘겹게 바닥을 기어가기 시작한다. 말라서 하얗게 질린 손가락과 꺾인 발목이 망인亡人의 것 같아, 경염은 참을 수 없어졌다. 떨어지면서 들추어진 아랫자락이 못내 가슴 아프다.




"다 했소?"


"놓아 주..십시오! 흐,흑..으...가야 할...,"


"적염군 사건도 전쟁도 끝났소. 그러니, 이제 그만 내 품으로 돌아와."


"..곳,이..있..."


"더는 널 상하게 할 수 없다. 임수."




엎드러진 그의 종아리를 잡는다. 헐떡대며 저를 밀쳐내려 혈안이 된 몸을 강제로 덮쳐 안았다. 허억-어─ 어깨에 더운 숨을 쏟아내던 사내가 간헐적으로 바르르, 바르르 몸을 경련했다. 황상皇上, 소경염의 손길이 옷자락 안으로 사라진다. 




"차라리, 죽ㅇ..."


"짐이 그대를 품을 것이니, 거역하지 마시오."


"죽여다오."




매장소는 꿈을 꾸는 목소리였다.




"…경염景琰."








* 사각死殼
죽은 조개의 껍데기




오늘 할 일이 많아서 짧게 끊어버렸지만 뒤를 꼭 이어보고 싶은 슷호리.

앵슷이 끌리는 날이 있습니다....

365일중에 365일 정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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