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등성이 넘었을 때 네발의 짐승 무리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발자국이 끊긴 지점에서부터 한 무리의 사내들이 비탈을 내려서고 있다. 중앙에 자리한 사내를 필두로, 각기 다른 문양과 색으로써 갑주甲胄를 장식한 자들이었다.

 

 


"흑요. 바람이 좋지 않습니다."

 

"음."

 


 

흑요黑曜라 불린 사내는 무리의 우두머리인 듯 보였으며, 풍향을 지적한 수하의 말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을 등지고 있는 탓에 거리가 멀더라도 그 체취를 숨기기가 쉽지 않아졌다. 등성이 하나를 넘기 직전까지 그들은 한 떼의 늑대들로 설원을 내달리던 차였다.

 

흑요는 특히 털빛이 검고도 수려한 늑대로, 부친의 죽음 이후 줄곧 이 무리를 이끌어 왔다. 늑대들은 번식력을 갖출만큼 성장하기 전까지 아명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은데, 흑요의 아명은 경염景琰이었다. 그의 아명을 스스럼없이 부를 수 있는 존재는 무리에서 손에 꼽을 정도이다. 경염의 생모를 비롯한 직계가족들. 그 외 아무리 나이가 많고 경험이 풍부한 늑대라도 경염을 우두머리로서 대해야 하는 것이다.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것은 물론, 철저히 서열을 따지는 늑대들의 사회에서 이것은 결코 바뀔 수 없는 불문율이었다. 경염은 성체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다지는 한편, 그의 무리는 근방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경염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흑색의 무복武服을 갖추었는데, 은실이 들어간 문라文羅 머리띠가 돋보인다. 경염의 은빛 문양은 눈밭이 내뿜는 광채를 그대로 반사하여 찬란할 정도였다. 등성이 아래 펼쳐진 대지를 훑던 그가 마침내 화살을 빼 들었다. 뒤에 몰려있던 무리도 무언가를 감지했는지 주변을 살피던 눈이 날카로워졌다.

 

잔바람이 일자 눈발이 스스스 날린다. 그 가운데 조심스레 모습을 드러낸 뿔이었다. 설원과 꼭 같은 색을 지녔으니 눈에 띄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 소나무 아래 제법 큼지막한 동물이 보인다. 뿔은 물론 발굽과 털빛이 모두 새하얀 사슴. 열심히 냄새를 맡으며 경계를 늦추지 않는 걸 보니, 필시 예민한 감각을 지녔을 터다. 까다로운 상대기인 하나 팽팽하게 당긴 활시위를 놓지 않는다.

 

 

 

 

"백록白鹿이 아닙니까. 백록은 신선들이 타고 노는 동물이라 알려져 있습니다."

 

"그랬던가."

 

"혹여 청야산 신선들의 노여움을 사게 될까 두렵습니다."

 

"척맹. 신선이 두려운가?"

 

"저어, 그런 게 아니라...."

 

"나는 죽음이 두렵다. 우리 무리가 굶주리고 지쳐, 멸족滅族하는 것 말이다."

 

 

 

몸집이 크고 목소리가 괄괄하던 사내는 곧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할 참이었다. 그러나 경염은 그곳에 눈길을 줄 틈이 없다는 듯 한곳을 응시하기에 바빴다. 새까만 동공으로 서서히, 하얀 잔상이 맺힌다. 아무것도 모르고 눈밭을 헤매인 흰 사슴이 귀를 쫑긋 세운 순간이었다. 푸른 눈동자로 곁눈질하던 짐승이 막 달아나려 발을 구른다. 투웅- 흑단黑檀으로 만든 경염의 활이 나지막이 울었다. 직선으로 올곧게 뻗어나간 활이 삽시간에 내리꽂힌다. 

 

 

 

"우리의 숙명이니, 굶어죽는 것보단 이게 나을 거다."

 

"흑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오른쪽 다리를 관통당한 사슴이 높다란 비명을 지른다. 슈우우우- 멀찍한 곳에서 눈 회오리가 일고 발소리가 바삐 울리었다. 아마도 주변에 산재해 있던 그의 동료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하는 소리일 것이다.


눈밭에 그대로 엎드러진 사슴이 앞발을 가련하게 휘저으며 계속해서 울어댄다. 이미 저는 살기 틀렸으니 그 일족들이라도 살리겠다고 애처롭게 구는 것일까. 멈추어 있던 사내들이 조금씩 걸음을 내디딘다. 다들 우두머리의 명 하나만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으리라.

 

 

"쫓아라."

 

 

흑요, 경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러빛깔 늑대들이 비탈을 쏜살같이 내달린다. 등털이 얼룩덜룩 여러색으로 뒤덮인 것이 있는가 하면 은빛이나 붉은빛 털을 지닌 늑대도 있다. 예닐곱 마리 늑대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 먹잇감을 쫓는 동안, 가장 후에야 비탈을 내려오는 그림자. 설원과 대비된 암흑색 늑대는 마치 백지 위에 툭 떨궈진 먹의 농담濃淡을 닮았다.

 

입김을 푸르르 품어낸 흑랑黑狼이 커다란 앞발을 내려앉힌다. 다리에 피를 흘리던 백록은 몸을 일으키려 안간힘을 쓰다가 그대로 짓눌린 채 고꾸라졌다. 우우-우─ 구슬프게 울어대는 사슴의 눈동자 끝으로 눈물이 맺힌다.

흑요의 차디찬 입김이 목덜미에 닿아 냄새를 가늠했을 때, 다량의 피를 흘린 백록은 그대로 추욱 늘어져 버렸다. 그 모습은 이미 숨을 거둔 것처럼 보여 퍽 싱거운 사냥이 될 참이었다. 허나 가슴을 짓누른 앞발로, 아직도 박동이 똑똑히 느껴지고 있다.

 

 

 

"……."

 


 

당장 목뼈를 으스러트리고 숨통을 끊어놓아야 할 것인데. 어쩐 일인지 고개를 주억거리던 흑요는 그의 하얀 빛깔 털을 할짝 핥아보았다. 그리고는, 미동도 없이 늘어진 몸뚱이를 물고 터덜터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이얀 눈밭으로 발자국이 찍힌다.

 

 

 

 



*

 

 


 

 

밤이 깊었다. 달이 떠오를 즈음이면 여러 곳에서 산발적으로 울음이 시작된다. 그것은 살욕에 굶주린 짐승의 것이며, 고독에 몸부림치는 망자의 것 같기도 하다. 임수는 구석으로 더욱 몸을 웅그린 채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었다. 매서운 북풍이 입구를 건드리면 갖가지 짐승털을 덧씌운 막사 한 편이 마구 춤을 추었다. 열린 틈새로 달빛이 어렴풋했다.

 

그는 막사 안 타오르고 있는 모닥불을 멍하니 응시한다. 좀처럼 추위를 타지 않는 낭족狼族들이 막사에 불을 피웠다니. 아마 듣고도 믿는 이가 많지 않을 것이다.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정처 없이 흔들리는 불길을 보며 이름을 곱씹는다.


소철苏哲.

임수林殊………


내가 누구인가, 어찌 불렸던가. 그나마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들이었다. 동료들과 함께 산책하던 능선이 그리웠다. 눈 감으면 금방 잡힐 것만 같은 모습은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황량한 밤바람이 그를 찾아온다. 끊임없이 맴돌던 울음이 사라지고 나서야, 임수는 주춤대며 불 가까이 기어갔다. 다쳤던 다리는 이제 간신히 걸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지만, 반대편 발목에 채워진 족쇄 때문에 기어다니는 것이 더 나을 판이다.


임수가 간신히 그 온기를 누릴 수 있을 거리가 되었을 때 입구가 다시 한 차례 펄럭였다. 단지 스치는 바람이 아니기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뒷걸음질 친다.

 

 

 

 

"아직도 추운가?"

 

"……."

 

"백록들 역시 추위엔 강한 체질을 타고났다고 아는데."

 

 

 

 

등롱 곁에 한 무더기 풀을 내려놓는다. 흑요의 뒤통수에 대고 허리를 숙였던 사내들 서너 명은 곧 막사 밖으로 사라졌다. 어떤 풀을 좋아하는지 도통 모르니 매번 가당치도 않은 것들을 무작위로 가져오다가, 언젠가부터 정확히 그 입맛을 고려한 것으로만 찾아오기 시작했다. 무리에서 가장 경험과 지혜가 뛰어난 언궐이란 자에게 자문을 구했다고 들었다. 한시도 떠나지 않고 막사를 지키는 자들이 정해져 있으니, 임수가 낮 동안 들을 수 있는 거라곤 새 지저귀는 소리와 밖을 지키는 자들의 사담 정도였다.

 

 

아직 싱싱한 기운 잃지 않은 것이건만, 임수는 그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다시 구석으로 몸을 피한다. 흡사 귀공자라 해도 모자람이 없을 흑요의 용모였으나 결국은 잔혹한 늑대일 뿐이다. 그 날의 일만 떠올리면 임수는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었다. 저와 함께 잡혀 온 서너 명의 동족들은 이미 숨을 거둔지 오래였다. 임수는 눈앞에서 뜯겨 나가는 동족들의 살가죽과, 늑대의 턱뼈로 으깨지는 두개골 따위를 모두 기억했다. 주둥이에 벌건 피를 묻힌 채 울어대던 짐승들을….

임수의 앞에 서 있는 사내가, 그들의 수장이다.

 

 

흑요는 다른 것 하지 않고 한동안 주변을 맴돈다. 뒷짐 진 채 가만히 임수의 표정과 기색을 살피는 것이었다. 화살이 다리를 관통했으니 영영 불구가 되는 것은 아닐까 싶었지만 요행히 그것만은 면하게 되었다.


몸 상태가 어느 정도 회복되던 차에, 낯선 사내가 막사 안에 누워있는 걸 보고 놀란 적도 있었다. 단순한 흰 사슴이 아니라 성록수聖鹿獸였단 말인가. 어린 시절 어미의 무릎 맡에서나 얼핏 들었던 신비의 종족이었다. 아마 그에게 사냥당한 백록은, 천에 하나 나올 법한 신비의 존재임이 틀림없었다.

 

 

 

 

"먹는 것이 충분치 않으면 몸이 축날 거요. 상관없단 뜻인가?"

 

"나를 살려서 얻는 게 무엇..입니까."

 

"……."

 

"다른 동료들,처럼....빨리 죽이지 않고. 이렇게 살려두는...이유가."

 

"궁금은 한가 보군."

 

 

 

 

순간 망설임 없이 다가온 사내가 무릎을 굽힌다. 경염이 웅그려 있던 자신의 발목을 쥐자 허둥대며 몸을 피하기 급급했다. 단지 근접한 것만으로도 풍기는 기운에 압도되어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으,으으- 막사 벽을 긁으며 안간힘 썼지만 결국 손쉽게 몸이 딸려갔다.


그 어느 면을 비교해도 낭족에게 물리적으로 당해낼 수 없는 것은 당연하고,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으니 애초 저항이란 통하지 않을 것이었다. 임수가 몸부림치자 단정하게 입혀 놓았던 백색 옷자락이 조금씩 위로 말려든다.

 

경염은 품에서 도망하려 하는 그의 목덜미를 살짝 깨물고 숨을 고른다. 단지 들숨과 날숨을 내쉬었을 뿐인데 꼭 짐승이 으르렁대는 듯 묘한 소리가 울렸다. 허공에서 손을 벌벌 떨어댄 임수는 기가 완전히 눌려버렸다. 고작 몸을 눌러오는 체중과 느슨한 잇소리에도 힘이 모두 소진되어 곧 죽을 것만 같았다. 공포에 질린 채 부들대던 임수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허리에 팔을 감은 사내를 밀어낼 생각도 못 하고 눈을 감는다. 손쉽게 몸을 안아들고, 경염이 짐승털 깔린 침상 위로 임수를 내려놓는다.

 

 

 

 

"나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끝 없고, 다스릴 부족원이 많소."

 

"그,것을..왜...."

 

"아직 후사에게 물려줄 영토 따위 없다는 말이지. 그런데,"

 

 

 

 

 

차마 제 피붙이에게도 우두머리 자리를 넘겨주고 싶지 않다는 강렬한 열망. 그것이 낭족의 특성인지, 경염의 강렬한 야망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검붉게 요동치는 그의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뼈와 살이 모두 녹아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임수는 제 몸을 짓누른 채 위로 올라선 사내를 끝내 외면하였다. 잇자국 가시지 않은 목덜미로 입김이 내려앉는다.

마치 설원의 첫 만남처럼.

 

 

 

 

"현재 우리 낭족이...번식기라오. 수컷이라면 결코 해결되지 않는 욕구지."

 

"……."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임수는 턱을 움켜쥔 사내가 원하는 대로 목덜미를 내주었다.

차디찬 손, 이미 옷자락 안으로 들어와 있다.

 

 

 



 

 

흰 사슴 소철슨생 보구싶어ㅠㅠㅠ

야망의 검은늑대 경염은.....욕구는 채워야겠고 이종끼리 교미하면 애는 안생기겠지 해서

임수 데리고 저러다가 덜컥 애나 생겼으면...(스렉


오타 수정은 나즁에!! 

 

 

화양련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