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매 - 춘양春陽 과 이어지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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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한이 대지로 내려앉았다. 금릉 전체가 동빙凍氷으로써 연명하는 것은 아닐까. 정왕의 구호 행렬이 금릉을 벗어나고 채 사흘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


매장소는 안 의원과 주변 보좌들의 만류로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고, 오로지 서책을 읽거나 차를 데우는 것 정도만 즐길 수 있었다. 그간 인상 깊은 일이었다면 비류가 자랑삼아 들고 온 커다란 빙주冰柱나 얼어 죽은 새 한 마리가 전부였다. 물론 후자의 경우 흉물을 내보였다며 안 의원에게 실컷 꾸지람을 듣긴 했으나….




"형님! 형님!"



창밖을 바라보던 차, 먼 곳에서부터 울리는 목청에 고개를 든다. 한기가 고스란히 들이치고 있건만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선 행색이 요란하다. 추향색秋香色 의복 위로 모피 얹힌 망토까지 둘렀으니, 이전에는 볼 수 없을 예진의 차림이었다. 급작스런 방문에도 별다른 말 없이 다기를 다루어 차를 내어 줄 참이다. 




"자네 목소리가 저기 대청에서부터 들렸어."


"그렇습니까? 이 청아한 음색 어디 가나요."


"예진. 무슨 일로 온 거지?"


"형님. 왜 그런 서운한 말씀을 하세요! 우리가 꼭 용무가 있어야 볼 사이랍니까?"


"원망듣기 싫어서 그래. 나는 내 몸 건사하기도 힘든 처지라네."


"그래서 제가 왔지요. 말동무도 해드리고. 응?"




원망이라. 괜한 소리는 아니었다. 이미 육안으로 봐도 배가 불러있는 상태인데 이 추위에 외출했다가 병이라도 얻으면 어쩔 텐가. 강골이라 자처하는 예진이었으나, 몸속에 태아를 품기 전과 비교한다면 필시 쇠한 부분이 있을 터였다. 차 향기를 음미하고 들이켠 예진은 살이 내린 듯하다. 아마 여기까지 찾아왔단 걸 들으면 경예가 탐탁지 않게 여길 것이었다. 




"제가 계집도 아니고. 처소에만 틀어박혀 있으려니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이 한파에 여길 찾아온 건가?"


"이것도 다 동병상련인데, 어째 형님은 저를 반기지 않는 모양입니다?"


"리양 장공주께서 그걸 허락하셨어?"


"실은 오늘 불공드리러 자리를 비우신 틈에...하하하."





예진은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다가도 이렇게 단단히 채비하고 왔다며 껴입은 옷가지를 젖혀 보인다. 회임한 이후로 장공주부长公主府에 함께 기거하고 있으니 이것은 자애로운 성품인 장공주의 결단이었다. 이전부터 부친의 반대로 잡음이 끊이질 않던 중 회임소식까지 전해지자, 결국 예진이 언국구부言國舅府 안에서 더는 지낼 수 없게 된 탓이었다. 다행히 두 사람의 뜻을 존중한 장공주가 기꺼이 예진을 식구로 맞아들여, 양가를 둘러싼 혼례문제는 잠시 소강상태를 맞은 차다.



늘 쾌활하고 웃음을 놓을 줄 모르는 예진이었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보이나, 매장소는 내심 그를 걱정하는 마음이 앞섰다. 어린 시절부터 부정父情에 대한 갈구를 숨겨둔 예진은 남몰래 속앓이한 세월이 짧지 않을 것이었다. 비슷한 아픔을 지니고, 온전히 품어줄 수 있는 배필로서 경예와 이어진 것은 천만다행이었지만 그것으론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이 여전할 터다.




"부친께 소식을 전하고는 있나?"


"또 무슨 환난을 겪으려구요. 됐어요. 나중에나 찾아가죠 뭐."


"나중에. 언제."


"뭐어- 손주 놈 안겨드리면 좀 나으려나?"


"자네 넉살은 정말 알아줘야 해."


"아이고. 어디 보자. 우리 종자從子님 옥체는 평안하신가."


"...어딜 만져?"


"같은 처지에 뭘 내외를 합니까. 정 억울하면 형님도 제 배를 만지시면 되죠!"




아래 덮고 있던 모포를 뚫고 불쑥 손이 들어왔다. 당황한 매장소는 잠시 엉덩이를 뒤로 빼는 시늉을 했으나 붙잡는 힘에 의해 막혔다. 오히려 매장소의 손을 쥐고 부풀어 있는 제 배 위에 올리는 행동까지.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동그랗게 뜬 행색이라, 예진은 그게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저와 달리 아직까진 평범한 사내와 다를 것 없는 매장소의 배였다. 그런데도 정성스레 배를 쓸고 어루만지니 이 무슨 해괴한 광경일까. 


흣,흠. 헛기침한 매장소는 멀찍한 데서 숨죽여 웃고 있는 견평과 려강을 발견했다. 미간을 찌푸리고 물러가라는 듯 손짓을 해댄다. 두 사람은 명을 따르면서도 여전히 웃음을 멈추진 못한 것 같다.




"형님. 제가 배부른 선배로서 조언을 드리자면요."


"아니. 됐네."


"속는 셈 치고 듣기라도 하세요. 네? 일단 밤이 깊어 부부가 한 이부자리에 들면...."


"예진. 제발,"




뒤늦게 그 입을 막으려 했지만, 끝끝내 고개를 털어대며 제 할 말만 이어가는 예진이다. 싸늘한 기운 돌던 내실에 조금씩 온기가 씨앗을 키운다. 










귀가한 경예는 가장 먼저 모친께 문안을 들고, 종복들에게 불을 더 지피라고 일렀다. 한동안 추위가 물러가지 않을 것이라 하니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고 당부의 말도 아끼지 않는다.



금일 이복누이인 우문념이 남초로 돌아갔기에 환송했는데, 해가 짧아진 탓인지 돌아오는 길이 유독 길게만 느껴졌다. 하루종일 틀어박혀 답답해했을 누군가를 떠올렸으니 당연한 이치가 아닐까. 처소 문턱을 넘는 발걸음이 좀 더 빨라졌다.



"예진....자?"



정작, 처소 안은 적막이 감돌아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들자마자 왜 이리 늦었냐며 타박할 것을 짐작했건만. 경예는 그 대신 제대로 정돈조차 되지 않은 옷가지들이 널려있는 걸 주워내며 혀를 찼다. 예진이 외출했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한 탓이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이 친구야. 대체 이렇게 추운데 어딜..!"


"설마 형님한테 다녀온 거야? 가서 또 성가시게 굴고,"



잔소리를 늘어놓던 목소리가 차츰 멈춘다. 옷가지를 침상 한쪽에 던져놓고, 걸터앉아 어깨를 쓰다듬었다. 이미 훌쩍거리는 소리가 분명한 중이라 모르려야 모를 수도 없겠다. 반대편을 보고 웅그려 누운 예진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보나 마나 눈썹을 엉망으로 구기고 콧물까지 흘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경예는 조심스레 다가들어 어깨를 감싼다. 목덜미에 얼굴을 대자 도리어 흐느낌이 심해졌다. 



"또 뭐 때문에 눈물 바람이야."


"몰라...다 모른다고! 씨이...애 가지면 사람도 아니야? 내가 계집도 아닌데..맨날 처소 안에서..."


"알아듣게 얘기해야지. 예진. 응?"


"장공주께서 실은....사실 날 미워하는 게 아닐까? 경예. 넌 뭔가 알고 있지?"


"또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군."



퍼뜩 떠올랐다는 듯 몸을 돌려앉는다. 팔뚝을 붙잡고 물어오는 예진은 이미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어 한눈에 보기에도 애처로울 정도였다. 허락도 없이 외출했다가 모친에게 꾸중을 들었으리라. 예진은 저를 걱정하고 보살피려는 마음을 헤아리기보단, 그저 서럽고 답답한 심정을 떨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어머님의 표정이 좋지 않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군. 홀로 되새긴 경예는 익숙하게 그를 끌어안고 다독인다. 다소 아이같은 구석이 있긴 했어도 예진 역시 무예를 익힌 사내로서의 기상은 쉽게 뒤지지 않았다. 단지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면서 눈물도 많아지고 감정 기복이 종잡을 수 없으니, 그럴 때마다 경예는 미안한 마음과 애처로운 마음이 뒤섞이곤 했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예진의 얼굴을 정성스레 쓰다듬고 볼을 마주 비비기도 한다. 


경예는 양팔로 몸을 모두 감싸 안고 좌우로 어르는 시늉을 했다.




"정말 아이가 따로 없군."


"흐으..윽..그래서, 싫은가?"


"누가 뭐래. 나 아니면 누가 자네를..."




장난삼아 핀잔 주려던 걸 멈춘다. 품속에서 왕왕 우는 소리가 도를 더해간 탓이다. 말없이 그 모습을 한참이나 내려다보던 경예는, 예진의 몸이 저를 정면으로 향하도록 하고 바짝 다가갔다. 허리를 끌어안아도 부른 배 덕분에 약간의 틈이 생긴다. 코끝이 발갛게 달아오른 홍안紅顔. 연인의 얼굴이다. 그는 축축한 입술에 숨을 마주했다. 




"에이. 말로 해선 안 되겠네."


"...그럼."


"뜨거운 물에 담그고 실컷 혼내줘야겠어."


"지,진짜?"


"응."




코끝을 살짝 꼬집는다. 예진의 지친 몸을 뜨거운 물에 씻기고, 어느 한구석 남는 곳 없이 달래주리라. 경예는 틀림없이 마음먹었다. 




"그럼, 다른 건."


"뭐?"


"다 벗구 씻기만....하나?"


"이 화상!"



신줏단지 모시듯 들쳐 안았던 몸이 휘청한다. 이마를 한 대 쥐어박았으면 좋겠는데. 이윽고 터지는 웃음소리에 스르르, 스르르 마음이 녹아들고 만다. 창밖으로 새는 다정한 속삭임 탓일까. 처마 아래 맺힌 빙주가 부서져 내렸다.




* 빙주冰柱 = 고드름







그냥...그냥 경예진도 행복해라...(병자

둘다 너무 아픔 간직한 캐들이라서 진쟈 애틋허다..

예진이 활짝 웃을 때 너무 아름다워서 그때마다 이세상 꽃이 백 송이씩 피어나는 기분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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