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여덟 시 사십 분.
하 건은 경성 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장교복을 발견한 보안병의 안내에 따라, 특실로 걸음을 옮긴다. 4인 이상 수용 가능한 특실 내부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이 닫기고 나서야, 품 안에 넣었던 지령을 다시 확인했다.



상해주둔,
요코스카橫須賀 해군항공대海軍航空隊 ─ 소위 다나카 히로토 たなかひろと.



위장된 신분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암기해야 한다. 밑으로 약력과 성장배경, 가족관계 등 자세한 사항들이 적혀 있다. 빠른 눈으로 그것을 훑고, 종이에 불을 붙인다. 발치의 수거함에 타오르는 종이를 넣었다. 좁은 내부에서 진회색 연기가 피었다. 짐짓 덤덤한 표정이 되어 창밖을 바라본다.
이번 임무는 특히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조선 헌병대 수뇌부까지 침투하여, 그 고위급 장교를 암살하고 추가정보를 탈취하는 게 목표다.

경성 주요 연락책이자 요정 마담인 안성심의 주선으로 그들의 유흥자리에 자연스레 융화되어야 한다. 그녀는 상해에 계신 대모님을 접하러 갔다가 우연한 계기로 해군항공대 소위인 다나카를 만났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헌병대 장교들에게도 다리를 놓아주게 된다는 각본이다. 최근 무기 거래 동향과 상해 전세에 대해 떡밥을 던지면 필시 솔깃할 거리가 되겠지.


"아직도 겨울이네."


창밖의 풍경에 평한다.
하염없었고, 눈은 녹지 않을 것이었다.






붉은 치마 






"위압엔 위압으로 답하세요. 정도가 없는 자들입니다. 곤란한 질문이거든 담뱃재를 터세요. 제가 답하죠."



문간 앞에 서서, 안성심이 마지막으로 일러준 말이었다. 미닫이문을 열자 그야말로 별세계가 펼쳐져선 두 사람을 맞았다. 울리는 곡조에 맞추어 춤을 추는 여인들, 헌병대 제복을 입은 사내들 옆에서 꽃처럼 웃고 있는 여인들 일색이다. 대개는 아직 채 피지도 않은 어린 처자들이었다. 요정 기생들은 물론, 요정 지붕 아래서 숙식하는 모든 이들은 마담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들이었다. 검은색 장교복 차림의 건이 들어서자, 술 따르고 아양 떨던 여인들의 눈빛이 찰나 바뀌었다.

안성심은 개중에 가장 고위급인 대령의 옆으로 건을 인도했다. 요코스카 부대의 위용에 대해 다들 한마디씩 거들며 악수를 청했다. 능숙한 일본어로 화답한 하 건. 다나카 소위는 여즉 대령 옆에서 자리를 잡고 있다가 술잔을 채워주는 여인에게 눈인사했다. 옥빛 저고리에, 옷고름이 은은한 붓꽃을 떠올리게 했다. 화장기는 거의 없었고 머리를 올리지 않은 것이 틀림없는 동기童妓였다. 다른 화사한 여인들도 많건만, 대령 옆에 앉힌 재목으로는 의외다.



"다나카 소위는 경성에 어쩐 일이지요?"

"예. 상부 명령으로 들어왔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기밀사항이라..죄송합니다."

"하하하. 소위는 그야말로 군인체질이군요."


"과찬이십니다."



호탕하게 웃어제끼는 대령이 어깨를 두드린다. 앞으로 내밀어진 술잔에 응했다. 독한 술이 목을 타고 넘어간 것이 여러 번인데 취기는 돌지 않는다. 상을 둘러싼 여섯 구의 몸뚱이가 시체로 보였다. 곧, 그리 만들 것이었다. 놈들이 도륙한 조선인을 합친다면 만수산을 이룰 터다.


하 건은 조로록 채워지는 술잔을 바라보았다. 웃고 교태부리는 여인들 사이에서, 유독 한 여인만 냉한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찬찬히 뜯어보려면, 치장이 덜했으나 미색은 빠지지 않았다. 낯색이 맑고 고왔는데 오똑한 콧망울 곁으로 작은 점이 단려한 느낌을 주었다.



"미색이 뛰어나지요? 마담의 여식이라 합니다."

"예. 그렇습니까."

"소위의 맘에 든 것이 아닌가?"


"아닙니다."

"소위. 조선에 왔으면 조선 계집 한 명쯤은 품고 가야 황군의 위신이 서지 않겠나?"



대뜸 어깨동무를 해오며 거나하게 지껄이자, 주변 사내들이 맞장구를 치며 웃어댔다. 방 안의 모든 이들이 요란스레 웃음을 터트리는데 세 사람만 웃지 못했다. 하 건, 안성심, 그리고 그녀의 여식. 건은 깊은 눈으로 마담을 바라본다. 대의를 위해 친자식의 안위마저 담보로 내걸었다니. 듣던 것보다 대찬 여인이었다. 물론 거짓으로 꾸몄을 수도 있겠으나 모전자전이라. 흔들림 없는 곁의 눈빛을 가늠하고 나서 건은 확신했다. 여인은 안성심의 친여식이 틀림없는 것이다.

굳은 표정으로 침묵하는 낯을 보고, 건너편 성심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상관이 명하는 일에 불복이란 있을 수 없다. 일본군들이 조선 여자들을 노리개처럼 다루는 것은 당연한 순리가 되었다. 이 차에 꼿꼿한 자세로 반목한다면 의심을 사는 게 당연지사인 것이다. 건은 숨을 몰아쉬며 입꼬리를 올린다.



"소위!"

"예. 대령님."

"당하幢下, 황군의 위용으로 이 계집을 품도록."

"……."



건은 차마 답하지 못했다. 절도 있게 묵례한 뒤 입모양을 흉내 냈을 뿐이다. 취기가 오른 탓에 대령은 제 술잔을 비워내고 웃어대기에 바빴다. 양해를 구한 건이 담배를 물자, 곁에 있던 여인이 불을 심어 주었다. 눈두덩은 희었고, 열 손가락 끝으로 붉은 멍울이 져 있었다. 봉숭아물을 들였구나. 건이 담뱃재를 털었을 때였다.



"그러시지요. 아이는 데려가서 준비시키겠습니다."



성심은 잔잔히 웃어 보이더니, 제 딸을 이끌고 방을 나섰다.





. . .





곁방에서 스멀대며 소리가 샜다. 끊길 듯하더니, 밤귀신처럼 바닥을 기어 이곳까지 찾았다. 남녀가 교접하느라 내는 소리인 것을 모를 리 없다. 어둑한 방에 불을 밝히자 둥그렇게 화점이 퍼져나갔다. 붉게 입술을 칠한 여인은 가까이서 보니 마담과 닮은 구석이 있어놨다.

코트만 벗었을 뿐, 제복 차림으로 정좌를 풀지 않은 건이다. 이 어색한 기류를 참을 수 없어 헛기침을 해대는 동안 여인은 입고 있던 한복 옷고름에 손을 얹었다. 빤히 저를 쳐다보면서 옷고름을 풀어 내리는 통에, 건은 그녀의 손을 잡고 말렸다.





"이럴 필요는 없어."


"상관이 명한 계집은 품는 게 미덕입니다. 아침에 핏자리 확인할 테니, 따르지 않으면 내가 죽습니다."

"어머니가 시키는 일은 뭐든지 하나? 그게 당신을 망쳐도?"

"누가 그럽니까 뭐든지 한다고. 나는, 내가 믿는 일을 합니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킬 뿐이고."

"..마담이랑 꼭 같네."

"어머니 배에서 나왔으니까."




끝끝내 옷고름을 풀어내더니, 이제 제복에 손을 뻗는다. 어깨를 어루만지다가 그대로 단추에 손을 댄다. 태연한 표정이었으나 옷을 벗기고 있는 손은 잘게 떨리고 있다. 건은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벗겠소. 작게 속삭인 와중에도 옆방에서 자지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흘끗 벽면을 바라보는 눈동자, 속눈썹이 파들리는 것을 모두 보았다. 상의를 벗은 남자가 가까이 다가들자 속눈썹은 날갯짓처럼 떨리었다. 가련하고, 처량한 만남이다. 그는 눈두덩에 슬며시 엄지손가락을 얹는다.


여인은 눈을 감긴 채 말을 이었다.
작고 흰 손이 더듬더듬 찾아와 팔뚝을 쥐었다.





"나를 당신 계집으로 만들어요. 한 달 후 신축 공사관 준공식 때 당신이 초대받으면, 나를 데려가야 합니다."

"데려가면."

"나는 단상 위 인물들을 저격합니다. 당신 엄호도 맡을 거고."

"이것도 다 각본인가? 당신이 내 방에 들여지는 것까지...여기까지 짐작했나?"

"중요하지 않잖아."

"……."

"정신 똑바로 차려요. 당신이 실수하면, 우리 다 죽습니다."




건은 팔뚝에 올려진 손을 보며 물었다. 차마 하얀 얼굴을 보았다간 심정이 요동칠 것만 같았다. 자국이 남도록 세게 쥐고, 여인은 도리어 그를 종용하는 것이었다. 숨을 몰아쉰 그가 얼굴을 감싸 쥔다. 콧날과 콧날의 사이가 좁혀진다. 작고 덜 피어난 몸이 추위에 떨고 있었다. 아직도, 겨울이다.



"내 이름은, 안옥윤이야."



입술이 맞닿았다.




. . .





1948년, 8월.




한 무리 졸개들이 앞으로 치닫는다. 비탈을 올라가더니, 저들끼리 소리를 빽 지르며 뛰어 내려왔다. 숨바꼭질하겠다는 것인지 둥그렇게 모여 입씨름을 하다가 경적 울리는 차에 놀라서 삽시간에 흩어졌다. 라디오 속 아나운서가 임시정부 수립에 관한 뉴스를 전했다. 음질이 좋지 않고 군데군데 끊기는 바람에 종국에는 다시 시작된 달음박질에 그마저도 뭉개졌다.

평상에 멀거니 앉아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뙤약볕 아래에서 유일한 그늘이 딱 평상 너비만 했다. 발끝이 그늘 밖으로 나가 볕에 쏘였다.

일본이 항복 선언을 하고도 3년째 접어든다. 많은 일이 있었다. 항복 불과 5개월 전, 공사관 저격 사건은 두고두고 회자된다. 암살주범 두 명이 도주 중에 사살당한 것으로 기사가 나갔지만, 사실 한 구의 시체는 찾지 못하여 헌병대며 경찰 할 것 없이 한바탕 소동이 났을 것이다.



"아제. 요거 나 주소."



총상 투성이인 두 개의 몸이 서로 기대어 걸었다. 복부 과다 출혈로 쓰러져 영영 일어나지 못한 여인이 있다. 숨을 거두며 말하길, 작전은 성공했으니 후일에 자책 말라는 것이었다. 고작 이별이 이처럼 매정한 것이라면 만나지도 말았어야 맞았다. 산등성이 뒹굴어 내려오면서 남자는 울고 또 울었다. 갈비뼈 아래서 피가 울컥 솟는데 아픈 줄도 몰랐다. 산 가운데 외따로 남겨진 몸이 가여워 잠도 자지 못했다.



"아제. 아제. 나 주면 안 되오?"

"그래. 너 가져라."



넋을 놓고 있던 몸을 흔들고 뒤채자, 그제서야 곁에 두었던 동전닢을 냉큼 주었다. 상고머리를 한 계집아이가 신이 나서는 달음박질친다. 밟는 족족 모래 먼지가 피어 부옇게 일었다. 뛰어간 발치로 드문드문, 벽면 틈새 비집고 돋아난 춤사위가 있다. 붉어서 휘몰아치는 치맛자락을 보고, 비로소 여름이구나 한다. 뭉텅 피어난 자락이 무거워 못내 고개를 숙였구나.


건은 비어버린 제 팔뚝을 쥐었다.
불그스레 물든 손끝이 이제 없었다.




"겨울이 갔는데, 오질 못하네. 당신."




붉은 치마를, 차마 건드리지 못한다.









울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어언 간에 여름가고 가을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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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 꽃말합작 참여했던 글입니다

오늘 유독 그리운 살암들이 있어서 재업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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